백로 전 미발(白露前未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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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백로는 24절기의 하나, 15번째로 처서와 추분 사이다.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이다. 가을 초입으로 추색이 완연하다 하나 아직 낙엽은 없다. 무더위를 몰아내는 계절의 첨병이라 나처럼 여름내 헉헉대 온 사람에겐 선선하니 자애롭다. 갈바람을 데리고 온다 꾸짖으랴. 나무들도 단풍 준비에 부산할 것이라. 어느새 벌겋게 불타는 가을 산을 기다려 가슴 설렌다.

양력 9월 7,8일경이니 계절의 완충지대, 아직 덧옷을 꺼내기엔 철 이른데,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스치는 바람 끝날의 냉기가 별안간 낯설다. 하지만 입던 입성대로 지낸다고 고뿔 걸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조금 만만한 절기다. 놓쳐선 안될 게 바로 이것이다. 이 틈새를 비비고 들어가 마주하고 선다면 팍팍한 일상에 낭만을 불러들일 여유 공간이 다가올 것이다. 다만 홀연히 추위가 닥쳐올지 모른다고 걱정을 가불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백로(白露)엔 ‘흰 이슬’, 들판에 덮인 이슬빛이 순일하다. 많이 내린 날에 앞마당에도 나가 서게 그 빛깔이 희디희니 처연하다. 은연중 눈이 달려가 풀잎 끝에 맺힌 이슬에 가 있다. 가을빛이 방울방울 윤슬로 영롱하다. 장마가 걷힌 뒤라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다.

속담에 나온다. 백로 전 미발, ‘이때까지 패지 못한 벼는 더 크지 못한다.‘ 했다. 백로 전 이슬에 얹어 서리까지 내리면 농작물이 시들고 말라빠진다 생각한 것일 테다.

농가에서는 백로 전후해 부는 바람을 유심히 관찰해서 가을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이때 바람이라도 불면 해가 많다는 얘기인데, 비록 나락이 여물지라도 색깔이 검게 된다고 했다. 치명적인 빛깔이다. 논이 손바닥만한 제주에 벼농사와 관련한 속담이 있어 흥미롭다. 밭농사 위주이면서도 그만큼 농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제주인들의 취향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백로에 비가 오면, 대풍(大豐)이라 여겼으니, 가을걷이를 목전에 두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남의 도서 지방에서는, 8월 벌초에 비가 오면 ‘십 리 천 석(千石)을 늘린다.’ 했다. 풍년의 조짐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이날 선산을 찾아 벌초를 시작하며 조상 음덕을 기리면서, 소소한 가사 범절에도 눈을 돌려 챙기려 했다. 여름 농사를 마무리하고 나서 가을걷이할 때까지 잠시 숨을 고르는 때가 백로다. 금싸라기 같은 틈새를 이용해 부녀자들이 친정 나들이를 했다. 그게 ‘근친(近親)’이다. 친정집 방문이 간절했으리라. 보통 이웃 마을에서 시집왔기 때문에 ‘近’ 자를 쓴다. 넘어지면 코 닿을 이웃지간인 데도, 한 번 나들이를 못할 정도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농사일과 집안일에 매여 있었다.

조선의 대선비인 퇴계 이 황도 백로의 좋은 절기에 이는 흥을 억제하지 못했던지, 백로절을 맞이해 심회의 일단을 읊어 ‘만보(晩步)’라 했다. 그냥 지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농삿일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방앗간 우물터에 기쁜 빛 돌아/

갈가마귀 날아드니 절기 익었고/ 해오라기 우뚝 서니 모습 훤칠해/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원/ 숙원이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이 회포를 뉘에게 얘기할거나/ 거문고만 둥둥 탄다, 고요한 밤에’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는 사람들과 풍요로운 자연의 모습에 대비해 도저한 학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자신을 돌아보는 학자의 풍모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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