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했던 4·3…美군정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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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도 무장대 진압 위한 작전에 참여...전투기록은 나오지 않아
군의 강경한 진압에는 '칭찬'...양민 학살 주동자는 처벌않고 '묵인'
미군 제123통신사진파견대가 1948년 5월 15일 촬영한 사진. 9연대 고문관 리치 대위(왼쪽)가 한국군 장교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는 마을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군 제123통신사진파견대가 1948년 5월 15일 촬영한 사진. 9연대 고문관 리치 대위(왼쪽)가 한국군 장교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는 마을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군정(美軍政)은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약 3년 간 제주를 포함, 38도선 이남 지역을 통치했다.

제주에는 1945년 11월 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주둔했고, 초대 군정관은 스타우트 소령이 역임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2001년부터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조사팀을 파견, 4·3 관련 문서 3만8500장을 수집했다. 본지는 미군정의 보고서를 토대로 73년 전 4·3당시 시대상 살펴봤다. 【편집자 주】

4·3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948년 5월 5일 제주를 찾은 윌리엄 딘 주한미군정장관(왼쪽 두 번째)이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4·3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948년 5월 5일 제주를 찾은 윌리엄 딘 주한미군정장관(왼쪽 두 번째)이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미군, 한국군 장교와 진압 작전을 짰다

제59군정중대 병력은 장교 11명과 사병 63명으로 제주시 전농로 제주농업학교(현 제주국제교육원) 인근에 주둔했다.

초대 군정관 스타우트에 이어 베로스 중령이 부임했고, 1947년 12월에는 맨스필드 중령으로 교체됐다.

미군 조셉 그로스만은 1947년 봄 6주 동안 500~1000명의 미군 병력을 제주에 파견했다고 했지만, 실제 주둔 병력은 100명(중대급) 내외였다.

스타우트 군정관은 일제의 관리와 경찰을 등용했다. 친일파가 재등장했고, 군정관리의 부정부패가 창궐해 중앙언론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미군정은 대흉년에도 곡식을 매점매석하는 행위로 쌀과 보리가격이 급등하자, 농민들이 생산한 양곡을 강제로 수탈(공출), 배급하는 정책을 펼쳤다.

강제로 양곡을 거둬들었으나 골고루 배급이 이뤄지지 않아 도민들의 항의와 시위가 잇따랐다.

정부의 4·3진상보고서와 미군정 문서에서 미군이 무장대와 직접 전투를 벌인 기록은 없었고, 미군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1948년 5월 15일 촬영된 사진에서 제주에 주둔한 9연대 고문관 리치 대위가 무장대를 공격하기 위해 한국군 장교와 작전을 짜는 모습을 볼 때 미군도 무장대 진압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4·3당시 제주에는 경찰서 2곳에 경찰관 430명이 있었다. 11일 후인 그해 4월 14일 경찰의 업무는 9연대 장병 230명이 공동으로 맡게 됐다.

1948년 5월 제주에서 모집한 9연대 장병 41명이 탈영했다. 9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대령의 강경 진압에 반발해 장병 41명이 탈영, 한라산에 있는 무장대에 합류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장교들은 9연대를 신뢰할 수 없다고 한 반면, 제주에 파견된 서북청년단원들이 무장대 토벌에 지원한 것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12월 말 제주의 9연대는 대전에 있던 2연대와 교체됐다. 2연대 선발대는 그해 12월 17일 오후 8시 제주에 도착했다.

2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해 실전을 쌓은 부대로 초토화 작전에 나섰다. 194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많은 양민이 희생됐고, 이 시기에 중산간 마을 95%가 잿더미가 되는 등 그야말로 ‘초토화’가 됐다.

제주농업학교 인근에 들어선 제59군정중대 모습.
제주농업학교 인근에 들어선 제59군정중대 모습. 미 성조기가 게양됐다.

▲군의 강경한 대응 ‘칭찬’…양민 학살은 ‘묵인’

송요찬 9연대장(중령)은 1948년 10월 17일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총살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해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했다.

미군정은 그런 송요찬 중령에 대해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며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냈다.

군과 극우세력에 의해 양민들이 희생됐음에도, 미군정은 기소와 재판절차 없이 자행된 양민 학살을 벌인 주동자를 처벌하지 않고 경고만 하는 등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경찰 지원조직인 민보단원들은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폭도라는 이유로 양민 76명을 죽창으로 찔러 학살했다. 희생자 중에는 여성 5명과 여러 명의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미군정은 군중들이 적법한 절차 없이 폭도들을 처형하는 잔혹한 행위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상반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군인들이 양민들에게 가한 잔혹행위에 대한 보고가 매우 빈번히 올라온 것과 관련, 비록 군인들이 제복을 입었지만 월권행위는 시정돼야 한다고 경고했다.

미군정은 무장대가 경찰과 그 가족에게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앙갚음으로 경찰은 무장대들에게 너무 심한 보복을 가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이에 상응한 처벌은 내리지 않았다.

한편 주한미군고문단 피쉬그룬드 대위는 4·3이 종식될 무렵인 1949년 11월 제주를 방문, 실태를 보고했다.

제주도민들이 집을 재건축해야 하는 데 시멘트가 매우 부족하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섬 주변에 있는 유일한 전화선은 경찰용이어서 상업용 전화선이 복구될 때까지 경찰용 전화선 사용을 허락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도 서북청년단원 300명이 경찰에 남아있고, 200명은 관공서에 근무하면서 이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언론은 서북청년단의 통제 하에 있다고 보고했다.

군정장관 윌리엄 딘 미육군 소장은 1948년 5월 10일 치러진 북제주군 갑·을 국회의원선거에서 폭력세력의 준동으로 투표율이 50% 미만에 그쳤다며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미군정은 이듬해인 1949년 5월 10일 재선거로 두 명이 당선되자,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권한을 갖춘 200명 정원의 국회가 완성됐다며 대내외에 공표했다.

1948년 5·10국회의원 선거가 무산되자 급파된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가 제주항 밖에 정박했다.
1948년 5·10국회의원 선거가 무산되자 급파된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가 제주항 밖에 정박했다.

 

“美 정부, 제주4·3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인터뷰)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양정심 조사연구실장
양정심 조사연구실장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머물며 4·3자료를 수집·분석해 온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4·3과 관련된 문서 중 비밀 해제가 되지 않아 비공개 된 문서가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 곳곳에서 미국 정부와 미군이 생산한 문서는 국립문서관리청으로 들어오는 데 문서량이 방대한 반면, 이를 분류할 인력은 부족해 지금까지 공개된 문서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양 실장은 “4·3과 관련된 극비·첩보문서는 여전히 비공개 돼 4·3에 대해 전적으로 미국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양 실장은 이어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거나 이를 지시·명령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무장대나 민간인을 상대로 직접 교전을 벌인 자료가 없어서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미군정 통치시기에 4·3이 발생한 만큼 미국 정부는 도의적 또는 도덕적으로 제주4·3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실장은 “1949년 5월 윌리엄 로버츠 주한미군사령관이 위싱턴에 있는 미 육군성에 ‘(4·3이 끝날 무렵)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민들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홈런이었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미군정은 4·3을 좌우 대결의 구도로 봤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지만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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