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본능
회귀 본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꿀벌이 꿀을 따려고 날아간 다음 집을 옮기면 본래 집이 있던 곳에 떼지어 몰려든다. 집이 아니라 위치를 기억하는 것이다. 연어는 태어난 강에 방류하면 며칠 안에 바다에 나가 연안에서 두석 달 지낸 뒤, 북태평양으로 가 4년 뒤에는 산란을 위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온다. 비둘기도 집을 중심으로 회귀를 학습시키면 그 반지름을 넓히면서 매우 먼 데서 되돌아온다. 이것은 학습과 회귀성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나는 인간에게 이 회귀성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를 6·25전쟁 때 ‘피란’이란 대이동을 보며 눈 시리게 봐 왔다.

1·4후퇴 직후였을까. 초등학교 1,2학년 무렵, 남북한 일대에서 남으로 남으로 전쟁을 피해 내려왔다. 피란민이라 했다. 민족의 대이동행렬은 국토남단 제주에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제주에도 피란민들로 북새통이 됐다. 그들이 머물 한 칸 방을 구한다고 마을 이장이 골목을 누볐다. 우리 집도 방 하나짜리 밖거리를 비워야 했다.

좁고 헐뜯어진 방에 서울서 내려왔다는 여섯 식구가 들어왔다. 옷이며 말씨며 행색이 낯설었고, 그들에게선 못 맡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머물다 갔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식구 중 또래가 여름밤 마당에 멍석 펴고 누운 내게 와 먹으라며 내밀었던 것, 처음 씹어 본 오징어의 맛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마당으로 별이 쏟아져 내리던 밤이었다.

얼마 후, 마을에 피란민수용소라는 초가 건물 대엿 채가 세워졌다. 피란민을 머물게 한 행정의 배려였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피란민들이 눈물겨웠다. 배를 채우는 일에 쫓겼을 것이다. 주민들이 추수한 뒤 빈 밭에 들어가 이삭을 주웠다. 특히 주운 고구마를 포대에 담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게 자주 눈에 띄었다. 그들의 얼굴에 짙게 드리웠던 그늘이 조금씩 걷히는 기미가 엿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오일장으로 유명하던 구좌읍 세화리 마을 시장 바닥을 그들이 하나둘 차지하는 낌새더니, 몇 년 새 상권을 거머쥐는 게 아닌가. 빵집, 신발가게, 잡화점, 가구점…. 날로 커 갔다. 장사에 어두운 사람에게도 번영하는 게 한눈에 띄었다. 타지에서 교직에 근무하며 고향에 가보니, 동창생 S 군은 시장 동네에서 세탁업을 하고 있었다. 세탁소는 처음 보는 간판이었다. 시골이지만, 다른 가게처럼 이웃에 여러 마을을 끼고 있어 유지가 된다고 했다.

피란 온 곳 심층 깊이 그들은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원주민보다 윤택한 삶을 사는 것 같았다. 그냥 된 것이 아닌, 죽자 사자 매달려 얻어 낸 전리품임을 나는 익히 안다. 낯선 곳에서 일어서 그들 면면이 당당해 보였다.

그들 중 태권도 9단이던 A는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절친이었다. 이북 출신이라 좀 거칠긴 했지만, 설득하면 부드러워 나하고 오래 교분을 쌓았다. 무도로 제자를 가르치며 넉넉지 못하나 곧게 살고자 애쓰던 친구다. 내가 유독 A를 말하는 것은 그가 끝까지 제주에 살다 세상을 달리해 뼈를 이곳에 묻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 상권을 좌우하던 그 많은 피란민, 어느만큼 부를 성취하자 하나둘 마을을 등지더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까지도 육지로 떠나가고 없다.

회귀 본능은 근원에 대한 애착이다. 통일이 안됐지만,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이 가자 함인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