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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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익 수필가

손 벌리면 닿을 듯 창 너머 민오름이 지척이다. 본디에 나무가 없어 민오름이라 했다 한다. 지금은 소나무를 주종으로 온갖 잡목들이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갈 때마다 숲에서 뿜어대는 푸른 공기와 피톤치드가 폐부까지 스며든다. 마치 산소탱크 같다. 그 싱그러운 이끌림에 나는 자주 민오름엘 간다.

가쁜 숨을 쉬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쉬지 않고 정상으로 다가선다. 두 팔을 벌려 웅크렸던 가슴을 펼치니 코로나의 갑갑함이 싹 씻겨나가는 듯하다. 허리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은 한낮에도 대부분 어둑한 그늘 터널을 이룬다. 코로나로 지친 방문자에게 새들도 저마다의 목소리로 응원을 보낸다.

옛사람들은 밭일을 가거나 마소를 먹이러 갈 때마다 거친 자갈길을 걸어서 다녔다. 순전히 일차적 생존을 위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을 위해 일부러 걷는다. 많은 사람이 걸음이 곧 건강이라 생각하며 올레길, 숲길을 걷고 오름을 오른다. 민오름은 한번 다녀오면 만 보를 채우는 데 안성맞춤이다.

땀 흘리며 숲길을 걷다 보면 희뿌옇던 눈안개가 걷히고, 멍때리던 머리도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음속의 편협한 생각과 굳어있던 감정도 느슨하고 유연해진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 ‘윌든 : 숲속의 생활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다.

걷다 보면 종종 생각에 빠지고 새로운 영감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던 길을 멈추어 얼른 핸드폰에 메모한다. 불현듯 나타났다 떠나버리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둬들인 글 알갱이들은 턱없이 부족한 글감 창고를 조금씩 채워준다. 오솔길에서 얻어지는 영감은 머리숱이 빠져나가는 영감의 글 가꾸기에 적잖은 도움이 되고 있다.

울울창창한 민오름과는 달리 나의 머리는 점점 벌거벗은 오름이 되어가고 있다. 한때 무성하던 머리숱은 어느새 빠져나가고 머리엔 야금야금 맨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숱도 가늘어지고 힘이 없어져 갔다. 이발할 때마다 뭉텅뭉텅 떨어지던 머리가 쥐똥 부스러기처럼 어깨 위에 살짝 내려앉을 뿐이다. 세수할 때마다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숱에 신경이 쓰인다. 아슬아슬 붙어 있는 게 한올 한올 아까울 지경이다. 욕실 하수구 뚜껑 위에 웅크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보면 한층 비애가 솟구친다.

민오름은 야생의 숲을 이루고 있는데 나의 두피는 점점 헐거워져 가는 것이다. 욕실로 들어서다 낮게 걸린 수건함에 맨살 부분이 툭 받치면 서글픔이 더욱 짠하다.

현업 시절 한 TV 방송의 토론회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방송을 본 친구가 어느 날 나를 만나자 머리부터 들여다보며 많이 빠졌구먼!” 하며 놀려댔다. 집에 돌아와 화면을 다시보기했더니 정수리 부분이 한가위 보름달 마냥 드러나 있었다.

그러던 나의 머리에 최근 조금씩 반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염색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의 밑동 부분에서 흰머리가 쑥쑥 솟아오르던 게 요즘 들어 하얀 색도가 현저히 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슥하게 잿빛으로 변해가던 검은 염색 부위도 큰 변화가 없다. 부지런히 민오름을 다닌 덕에 그곳의 푸른 정기가 머리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는 것일까, 산신령께서 가여운 정수리를 쓰다듬어 주고 계신 것일까.

요새 들어 허리띠의 코도 한 칸이나 쑥 줄었다. 언덕배기처럼 불룩했던 뱃살은 수평이 되었다. 한번 다녀오고 나면 비에 젖은 듯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독기도 빠져나간 듯 몸과 기분이 한결 가뿐하다. 육 땡의 나이에 구가하는 기쁨이다.

민오름은 코로나로 얼로너가 되어버린 나에게 활력과 희망을 심어주는 천연배터리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주춤거리지 말고 어서 오라 손짓한다. , 몸 가운데 또 다른 긍정 변이가 움틀지도 모르는 일. 열심히 걷고 부지런히 생각하며, 건강을 챙기고 필력까지 키우는데 제격인 것 같다.

이런저런 기대 속에 오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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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2021-10-14 20:54:21
재미있고 한번에 쉽게 읽혀지는 멋진 글 잘 봤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