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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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고향(故鄕)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개가 있다. 추억(追憶)과 그리움, 포근함과 어머니의 품속 등이 그것이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본덕리 85번지(본궁부락)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전학해 대부분의 학창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 전주 이(李)씨 집안의 첫 번째 손자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님께 특별한 효도를 하게 됐는데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고추(?)를 달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나의 부모님은 할머니의 크나큰 배려로 가까운 곳에 초가3간과 논 전답을 물려받고 분가의 쾌거를 이루었다.

곧 엄격한 어른들의 시집살이를 면책 받게 된 것인데 어머니를 대신해 큰어머니가 고모들과 함께 대가족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됐다. 당시 내 기억으로 우리 집은 궁궐 같은 집으로 대문은 솟을대문이요, 담장은 기와 담, 위채와 아래채 그리고 행랑채, 곳간과 마구간 등 방들이 30여 개가 넘었으며 위채는 마당보다 1m 이상 높은 터 위에 커다란 대청마루와 민화들이 방마다 붙어 있었고, 한지로 발라진 문들은 곱게 접어 천정에 매달린 문고리에 걸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당 가운데 자리한 샘은 두레박 길이가 20m 쯤이나 될 만큼 깊어서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어 노닥거리는 놀이터였으며 행랑채도 큰방과 작은 방 두 칸이나 돼 밤마다 동네사람들의 화투와 마작, 윷놀이 등이 판을 쳤고 위채에서는 할아버지의 시조꾼들이 매일 끊일 새가 없었다.

한 마디로 천석꾼 부잣집인데다 넘치는 인정과 퍼주기 좋아하는 할머니의 큰 손은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기억 된다.

역시 사람은 이러한 정(情) 때문에 때로 생사(生死)가 갈릴 수도 있다. 할머니는 3남 3녀를 두셨는데 그 중에 아버지는 큰아버지와 큰고모 다음으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큰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는데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신 분으로 대한민국 상이용사 출신인 아버지와는 사상과 이념이 달랐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전라도 지역은 북한군이 두 번을 지나친 곳이다. 한 번은 공격해 내려올 때였고 또 한 번은 후퇴할 때였는데 이 두 차례 과정을 겪으면서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로 곡간에 숨겼지만 동네 그 누구도 밀정노릇을 하지 않음으로써 두 아들을 위기에서 살릴 수 있었다. 평소 베풀고 산 덕택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깊은 사랑과 후덕한 인정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 속에서 성장했다. 나무도 성장할 때 거름을 많이 주면 큰 나무가 되듯이 베풀기 좋아하는 내 성격도 할머니의 후한 인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 큰 바위 얼굴 같았던 할머니도 가셨고 얼마 전 찾아갔던 고향 마을에는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기와집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콩밭으로 변해 있었다. 눈물이 아롱거려 차마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허전한 마음만 달래며 돌아왔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므로 집착을 놓아야 한다. 고향도 한 낱 그림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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