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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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생존해 계셨으면 올해 연세 상수(上壽)에 이르는 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곁에 산으로 앉아 계신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의 맑은 사상과 종교와 철학, 누리를 지폈던 사랑과 가난한 이웃을 품던 베풂의 삶을 되뇌다 보니, 가톨릭 신자가 아닌 문외(門外)의 무명(無名)임도 깜빡 잊었습니다. 망설임 끝에 다가앉게 됐음을 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추기경님은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지난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결론으로 말해 추기경님은 이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커다란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당신의 삶은 산업화·민주화라는 시대의 격동기를 헤치면서 우리 현대사와 교회성장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떠안으셨습니다. 시대의 양심이자 큰 어른이었지요. 양심의 소리를 일깨우는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중용으로, 때로는 매섭게 용기 있는 발언으로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길과 한국의 교회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사에서 밝힌 “교회의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단지 식사(式辭)에 그치지 않고 딱히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잊히지 않을뿐더러,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얘기를 해야만 합니다. 추기경님이 머물던 명동성당은 그냥 평범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핍박받는 이들에게 마지막 피난처이고 민주화의 성지(聖地)였으니까요. 우리를 전율케 했던, 당신의 속삭이듯 날 선 음성이 귓전으로 떨어집니다. 1987년 고 박종철 열사 추모 미사에서였지요.

“지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1987년 6월이었지요. 당신이 기도처인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많은 대학생들을 관계자들이 체포하러 오자 엄중히 꾸짖어 돌려보냈던 일,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때 당신의 음성은 처연하면서 단호했습니다. 오랜 잠에서 깨지 못한 우리의 의식을 흔들어 깨워 심금을 울릴 만큼 처절했었지요.

“여기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그리고 그 뒤에 우리 신부들이 있다. 당신들은 나를 밟고 수녀들을 밟고 넘어야 학생들하고 만난다.”

추기경님은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생명 존엄 사상의 실천자였어요. 추기경님의 제안으로 시작된 장기 기증 운동이 소리 없이 사회 전방위로 번져 13만 명이 넘었습니다. 당신도 사후에 각막 기증으로 시각장애 2명에게 빛을 선물했습니다.

사회 분쟁의 어느 현장. 근엄한 추기경님이 옷을 벗어 던지고 철거민의 남루한 비닐하우스에서 국수 한 그릇을 함께 먹으며 그들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참 목자. 민주화뿐 아니라 시국 관련 사건이 있을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앞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다들 양심의 문을 닫고 있던 70~80년대. 세상 안에, 세상을 위해서, 인류 구원을 위한 교회를 실현하기 위해 애끊는 양심의 목소리를 내었던 분,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던 자애로운 할아버지.

고단한 삶, 기댈 데 없는 시절인지 더욱 추기경님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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