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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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찬 수필가

강쇠바람이 부드럽게 갓 벌초한 공동묘지 주변을 노닐고 있다. 무더운 여름 볕과 모진 비바람에 묘지를 지키려는 잔디가 키를 돋우고 잡초로 덮였던 묘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석을 전후로 벌초를 하는데 할아버지 생전에는 조상이 명절에 오시게 하려면 그 이전에 벌초를 마쳐야 한다고 서두르셨다.

역사를 보면 조선 세종 때까지 제주도에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골짜기 등에 버렸다고 되어 있다. 기 건 목사 이후 매장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 도선국사(596~667)가 당나라 풍수가 일행 선사의 음택에 관한 영향을 받은 기록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영웅호걸의 권위는 천하를 거느릴 수 있지만, 후손의 병마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진짜 길한 터라면 지관이 먼저 그 부모를 장사지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음택풍수를 비판하였다. 서애 류성룡은 다산과 반대로 무덤 속에 시신이 쾌적하면 그 자손들도 편안하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조상의 음택은 명당보다는 얼마나 성의껏 돌보고 가꾸는가 하는 게 효행의 척도인가 싶다. 명당이라도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무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장되는 것을 보면 역시 착하게 살다 가야 명당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한여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방 안에 관을 모시고 병풍을 둘렀다. 부패를 늦추려고 어렵사리 얼음을 구해서 방 안의 온도를 낮추려고 애썼다. 조그만 선풍기는 열풍기가 되고 마당 멍석 위 조문객과 동네 사람들이 뒤엉켜 땀이 범벅인데 누구도 불만을 표하는 이가 없다.

묘지로 향하는 아침이면 조반에 술 한잔한 후 상여를 어깨에 올리고 출발이다. 부패한 냄새를 탓하지 않았다. 밀고 당기고 교대하면서 묘지에 당도하면 술 한잔하고 질토(묘지에 넣을 흙)를 나르고 줄을 서서 잔디를 밑에서부터 전달했다. 무덤이 완성되면 참여자 모두 차례로 절을 올렸다. 장례식장에 가서 망인께 절을 올리기보다는 상주 찾아 부조하고 얼굴도장 찍는 현재와는 크게 비교가 된다.

공동묘지에 가면 옛 모습 그대로 말끔히 벌초한 무덤뿐 아니라 자손이 끊겼는지 초목이 우거져 방치된 묘지도 있다. 내가 태어나자 할머니가 품에 안고 내 무덤에 풀 벨 놈 나왔다고 좋아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근래 유별나게 가족묘가 성행이다. 3~4일 이상 행하던 벌초를 하루 이내 마치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함인데 화장문화가 일조했다.

양택의 모습이 다양해 가는 것과 같이 음택의 모습도 다양해져 간다, 세월의 흐름이 예전 같지 않다. 산수 이전에 가족묘 자리만이라도 장만해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관심은 기회를 만나게 되나 보다. 우연한 기회 눈에 띄는 곳을 찍었다. 명당이 아니면 어쩌랴 자손이 쉽게 찾을 수 있고 풀을 버릴 공간이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음덕의 도움인가 주위가 아늑하고 천수답이던 넉넉한 자리가 보이는 곳에 마련할 수 있었다. 바쁜 시대를 살며 벌초를 해야 하는 자손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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