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새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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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비행기 잔해에는 내 아들의 피와 살점이 묻어 있다. 아들의 시신은 지금도 한라산에 남겨져 있다.”

4년 전인 2017년 2월 5일 한라산 관음사광장 특전사 충혼비에서 열린 추모식. 여든네 살 온영애씨의 애끓는 통곡에 늠름하게 도열했던 검은 베레 장병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온씨의 아들은 고(故) 시태일 상사. 고인은 28살이던 1982년 2월 5일 대통령 경호를 수행하던 중 순직했다. 이날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공군수송기 C-123에는 시태일 상사 등 특전사 최정예 707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 등 53명이 탑승했다. 군 수송기는 한라산 개미등 해발 1060m에 추락, 전원 사망했다. 당시 한라산에는 눈보라가 몰아쳤고 안개마저 잔뜩 꼈다. 비행기가 한라산을 지나면 안 되는 날씨였다.

장병들이 몰살된 다음 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제주공항 활주로 확장 준공식에 아무 일 없듯이 참석했다.

군 당국은 사후 처리마저 부실했고 사고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장병 53명의 희생은 ‘대간첩 침투 훈련 중 추락사고’로 발표됐다. 대형 참사였지만 당시 정권의 보도 통제로 사건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보도되지 않았다.

군 당국은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고·사망 원인을 발표하지 않았다. 전체 사망자 명단도 공개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대간첩 침투 훈련은 대통령 경호 임무인 ‘봉황새 작전’으로 밝혀졌을 뿐이다.

사고 전날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아들 시태일 상사의 전화에 목에 메였던 온영애씨는 사고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군·경이 가로막았다. 군인 외에는 한라산 출입이 통제됐다. 온씨는 여자 군복을 빌려 입고 산에 올랐다. 사고 현장은 산기슭이 절반이나 깎여 있었다. 뼈와 살점만 남은 시신들은 마대 자루에 담아 수습 중이었다.

수송기가 추락한 후 장병들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과 탄약이 폭발, 시신은 기체 잔해와 함께 흩어 뿌려졌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은 희생된 장병들이 찼던 시계가 모두 3시15분에 멈춰 있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온씨는 1986년 서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에 홀로 내려왔다. 서귀포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일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의 영혼을 기렸다.

온씨는 특전사 장병들이 한라산에 훈련을 올 때면 “유품이나 잔해가 보이면 꼭 갖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비행기 잔해마다 아들의 피와 살이 묻어있기에 수습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이런 모성애에 장병들은 추락 지점 인근 땅 속에 묻혀있던 유품들을 하나 둘씩 모아왔다.

특전사령부는 2006년 1월 충혼비 뒤편에 53명의 장병들의 시신 조각이나 다름없는 유품함을 설치, 고인들의 넋을 위로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특전사 충혼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질곡의 세월 속에 묻혀 졌던 장병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공식적으로 추모하게 됐다.

충혼비에는 검은 베레 모형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 훈(訓)이 새겨져 있다. 추모식은 매년 2월 5일 유족과 특전사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추모식 취재를 위해 현장에 갈 때마다 롤 케이크를 아들의 영전에 올렸던 온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온씨가 충혼비 앞에서 통곡을 할 때면 장병들이 달려와 부축했다. 어느 해에는 노환으로 다리를 절면서도 추모식을 찾았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30년 넘게 제주에 살면서 아들의 영혼을 지켰다.

지난달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자신의 경호를 위해 악천후에도 출동한 최정예 요원들이 희생됐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이나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검은 베레를 하늘나라에서 볼 낯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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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2021-12-10 12:43:43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