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萬華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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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빛의 반사에 의해 다양한 무늬가 변화하며 많은 상()을 나타내는 거울이 만화경이다. 같은 모양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천변만화(千變萬華)한다. 그래서 만화경이다. 갖가지 아름다움을 나타내나, 세속의 일이라 쌀의 뉘처럼 곱지 않은 것도 섞여 있다.

#1_동심은 나의 힘

김영기 아동문학가·시조시인이 책을 냈다. 동심은 나의 힘. 한곬 현병찬 서예가의 휘호가 묵직해 책의 품격이 느껴지는데, 도리우찌를 눌러쓴 팔순 저자의 다정다감한 얼굴이 온화하다. 그새 건너온 인생의 풍우 성상이 녹아 있는 얼굴인데, 평생 동심 속에 살아온 분이라선지 내 눈엔 연세를 잊은 듯 해맑고 순정하다.

머리글 제목 작은 보람 큰 고마움’, 나는 모두의 첫 두 문장에 긴장했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이다. 어린이처럼 그리는 데 80년 걸렸다.” 이 이상 어떻게 생략하고 함축하랴. 책은 자체로 자장(磁場)이었다. 어느새 수많은 동시, 동시조, 시조 속으로 들어가 있지 않은가. 661쪽에 방대한 김영기의 삶과 문학을 집대성한 80년 인생 회고록이다. 한 작가의 생애를 거대한 성으로 축조해 놓은 책 앞에 우뚝 선 채로 말을 잃는다.

#2_끽연의 젊은 여인

오랜만에 길 건너 단골 카페에 갔다가 우연찮게 들어온 장면이다. 40대 두 여인이 자리에서 한참 무슨 정담을 나누다 빨대로 커피를 마시며 건물 밖 나무 아래에 있는 의자에 마주 앉는다. 쌀쌀한 날인데 웬일일까 했는데, 볼일이 있었다. 급히 담배를 꺼내 불을 댕긴다. 갑자기 관음증이 작동했다. 이건 손놀림이 노숙한데다 서너 번 이어지는 줄담배다. 저쯤 됐으니 끊기도 어렵겠다. 내가 질리게 겪은 일이다. 우리가 사는 곳은 아직 담배 피는 여인을 용납지 않는 사회다. 남자도 금연을 강제하는 세상인데. 하긴 걱정도 팔자지. 요즘 세상에 남자다 여자다 하다 뺨 맞을라. 불현듯 옛날 어느 코미디 생각이 난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3_저게 외출복인가

겨울의 여린 볕은 자애롭다. 흙을 밟아 아파트 돌의자에 앉은 것만도 축복이다. 겨울에는 낙엽수 쪽이 취향이라 늙은 벚나무 아래다. 거대한 나무가 잎 하나 남기지 않고 발가벗었다. 빈 가지에 가 있던 눈을 내려놓는데, 젊은 여인이 지나간다. 거두던 눈길을 꼼짝없이 붙잡는 게 아닌가. ‘. 세상에 저런 옷을.’ 입이 헤벌어지고 말았다. 여인이 입은 옅은 분홍빛 아래옷이 내 눈엔 영락없는 내의다. 몸에 찰싹 달라붙어 몸의 선이 너무도 선명한 여인의 옷. 40대로 보이는 여인은 키가 큰데다 몸매도 탁월해 날씬하다. 풋풋한 젊음을 뽐내려는 건가. 하지만 저건 아무래도 과도하다. 아파트 경내를 벗어나 한길로 나가는 모양이다. 뒷모습이 당당하네.

#4_보라색 머리의 할머니

부부가 뜰을 거닐고 있었다. 이젠 누가 봐도 우리를 아파트 주민으로 보는가. 스쳐 지나다 한 할머니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몇 동에 사세요? 나는 여기 106. 2층인데.” 아내가 대답한다. “, 우린 바로 옆 105, 13층인데요.” 다음 만나면 더 깊은 대화를 하게 될 것 같다. 웃음이 밝고 거리낌 없다. 연치 여든다섯이라 해 움칫 놀랐다. 머리에 연보랏빛 물을 들였지 않은가. 그래서 얼굴이 뽀얗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다.

만화경으로 와 있는 세상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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