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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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큰 별이 졌다. 지난 2월 26일, 이어령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문학평론가·소설가·수필가·언론인 그리고 교수로서 한국 최고의 지성, 가장 맑고 밝은 철학으로 우리의 정신을 이끌던 시대의 스승, 이어령 선생이 세상을 달리했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 또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꽃이 보인다. 암 선고를 받고 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역설적으로 가장 농밀하게 산다.”던 선생의 목소리가 낙숫물처럼 떨어진다.

88서울올림픽 개막 식전 행사가 떠오른다. 기대와 설렘 속에 온 세계인의 이목이 한껏 쏠리던 그때. 홀연 어린 소년이 등장해 굴렁쇠를 돌리며 넓은 운동장을 돌았다. 적막을 한 켜 키우더니, 마침내 세계가 환호했다. 우리는 하나다. 이제 ‘화합과 전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벽을 넘어야만 한다. 그래야 실현할 수 있다. 이념과 인종과 종교와 사상의 높은 벽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메시지, 그것은 선생의 아이디어였다. 그날의 환호성이 되살아난다.

33세 젊은 나이에 이화여대 교수에 임용돼 30년 재직했고, 문학평론가로 등단하며(1956) 문단 원로의 권위 의식을 질타한 ‘우상의 파괴’는 충격적인 것으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술이 130여 종에 이른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이것이 한국이다》,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 한동안 선생의 책 속에 묻혀 그 투명한 지성과 가장 한국적인 감성에 황홀했다. 내 비록 미미한 독자의 자리에 머물렀으되, 선생은 내게 문학의 서늘한 그늘이었고, 가장 영향받은 작가이기도 했다.

“산다는 게 뭔가. 내 이야기 하나 보태고 가는 것 아닌가.” 2년 전, 암 투병 중에 남긴 말이다. ‘이야기 하나 보태고’, 인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함축할 수 있을까. 다시 맞는 아침, 눈부신 햇살에 몸 오싹한 전율을 느낀다.

“희랍어에서 온 자궁(움)과 무덤은 놀랄 만큼 닮았다. 인생은 태어나는 게 죽는 거다. 기저귀가 까칠한 수의와 닮지 않았나. 죽음은 인간을 멸하는 게 아니라 풍요하게 만든다.” 복막에서 시작한 암이 퍼졌지만 수술을 적절한 시점에 중단하고 집에서 지냈단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죽는 대신 그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고 실어서였다는 것이다.

선생은 마지막까지 사유와 저술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대학교수도, 장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야기꾼이다. 어린애가 할아버지가 돼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자신의 한 생을 회고하며 술회한다.

“세속적인 문필가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성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겸손이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다. 동행자도 없이 혼자서 내 그림자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던 삶이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경쟁자였다.”

지난해 12월, “시간이 없어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할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다. 은연중 다가온 생의 마감을 일찌감치 감지했으리라.

선생님, 이제 평생을 쓰시던 글도 멈추시고, 그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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