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읽는 회고가(懷古歌)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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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고려 유신의 회고가를 떠올린다. 나라의 패망과 새 왕조 창업이라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두 문인이 옛 나라에 대한 회고(懷古)의 정회를 담은 시조 2수가 오늘에 새롭다. 야은 길 재와 운곡 원천석의 시조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설 무렵. 많은 문신들이 갈등과 고뇌 속에 방황했다. 역성혁명이 사실이 된 현실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절개를 지켜 고려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이냐, 뜻을 새 왕조에 의탁해 부귀를 이어 갈 것이냐. ‘임 향한 일편단심’으로 충절을 지켰던 포은의 ‘단심가’는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많은 생각의 단초가 된다. 부질없는 인생을 어떻게 처신해야 현명한 것인가에 대한 답 중 본질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신하라면 나라가 망한 뒤, 옛 도읍 개성을 무심히 지날 수 없었을 것 아닌가. 옛일이 그립고, 국사를 논하던 옛사람이 보고 싶고, 다시금 임금의 총애가 사무쳐 목이 메었을 것이다. 사사로운 정리도 그러하거니, 신하로서 가슴에 맺힌 망국의 한을말로 다할 수 없었으리라.

먼저, 야은 길 재(吉再)의 시조 한 수를 소리 내어 읽는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허망했겠다. 야인 신세로 옛 서울을 한 필의 말에 올라 돌아보고 있다. 자연은 예전 그대로인데 갑자기 낯설지 않은가. 나라가 패망한 자리에 새 왕조가 들어선, 시국의 놀라운 변화를 통감하며 꿈만 같다고 회고한 것이다. 그 회고의 정회가 벅차 파열하듯 터져 나온 감탄사 ‘어즈버’는 절창이다. 짓눌러 참던 감정을 더는 주체하지 못했을 것 아닌가.

길 재는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제수(除授)했음에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고사(固辭)해 부임치 않았다. 노모를 봉양한다는 구실이었다. 우왕의 부음을 듣고는 음식을 가려가며 삼가서 3년 상을 행했다 한다.

두 번째, 원천석(元天錫)의 시조 한 수를 조용히 눈감고 읊조린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로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한 왕업의 패망을 ‘가을에 이운 풀’, 한 가닥 ‘목동의 피릿소리’, ‘석양’이라 암유하며, 화자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려 유신의 흉리에 맺힌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다.

원천석은 여말의 혼탁한 시국을 개탄해 치악산 깊숙이 들어가 은둔했다. 그는 이방원(태종)의 어린 시절 스승이다. 왕으로 즉위 후 그를 찾아갔으나 깊이 숨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의(忠義)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회고가의 배경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왕위 찬탈을 둘러싸고 엄청난 암투를 벌였음을 느끼게 한다. 고려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충절을 다하는가 하면, 시류에 편승해 영합했던 무린들 왜 없었을까.

벼슬을 내렸음에도 사양하고 초야에 칩거했던 고려 유신들의 삶의 지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회고가 2수를 읽으며, 새삼 ‘의리’를 생각한다. 교언영색(巧言令色),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낯빛으로 권력에 끌려다니는 것은 사람이 갈 길이 아니다. 두 시조는 정치인들이 마음속에 새겨야 할 ‘정치 교과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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