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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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천혜의 보물섬 제주에서 어느덧 10여 년을 넘겨 살다보니 이제 제주는 마음의 고향이요 여생은 이곳에서 마무리할 생각이다. 하여 제주에 대한 나의 애정을 담아 오늘은 제주의 삼보(三寶)인 돌과 바람, 물(삼다수)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꼽는 ‘현무암(玄武巖)’을 쌓아 만든 ‘제주 돌담’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앞으로 ‘제주 돌담’에 이어 ‘제주 바람’과 제주 ‘삼다수’에 대해서 시리즈로 써볼 생각이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평소 내가 주장해 왔던 삼불능(三不能), 곧 인연 없는 곳에 갈 수 없고(처소불능), 인연 없는 사람은 만날 수 없으며(대면불능), 인연 없는 법문은 들을 수가 없으니(청법불능) 제주와 나의 인연은 적어도 ‘전생인연(前生因緣)’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 돌담은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후 2014년 국제연합농업식량기구(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돌담은 예부터 작물과 흙과 씨앗을 바람으로부터 지키는 방풍 역할을 했으며 소와 말의 농경지 침입을 막고 소유지 구분을 짓는 일도 담당하였다. ‘25시’의 저자 게오르규도 제주 돌담을 가리켜 ‘세계적인 명물’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만큼 제주 돌담은 독특하고 희귀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또한 제주 돌담은 그 이어진 모습이 흑룡 같다고 하여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부르기도 한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외담, 겹담, 잣벡담(넓게 쌓은 담)이라 부르며 또 쌓은 위치에 따라 축담(초가집), 올레담(동네길목), 개담(고기잡이), 산담(분묘보호), 환해장성(외적의 침입) 등이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원형을 잃어가거나 훼손되는 돌담이 11%에 달한다고 하니 체계적인 보전대책과 관리가 시급한 현실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파도엔 조선1750년(영조26) 때 흑우를 방목하기 위해 ‘별둔장(別屯場)’이라는 국영목장을 설치하고 돌담을 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1840년(헌종6년)에 영국 함선이 섬에 상륙해 흑우를 약탈하는 사건이 있고 난 후인 1842년 목장이 폐쇄되고 말았다. 돌담은 척박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내는 제주인의 개척정신과 지혜를 담고 있어서 제주를 상징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게다가 미학적 경관적 가치도 높기 때문에 문화자원으로 반드시 보전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고려 원종 때의 명현(名賢) 김구(金坵)선생은 제주로 판관 부임을 받아 내려왔는데 제주의 경관에 반하여 재임 기간 동안 제주의 전통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는 탐라인들의 땅에 대한 소유권 분쟁을 해결해 주기 위해 제주의 돌을 가지고 밭담을 쌓아 경계를 표시해 줌으로써 제주인들로부터 크게 칭송받는 판관이 되었다.

이처럼 제주 돌담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제주와는 불가분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하루 속히 제도적인 보전관리가 시급하다고 판단된다. 자고로 역사와 문화를 소홀히 하게 되면 국가의 백년대계 역시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제주어 역시 방언(方言)이 아니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재의 일원임을 깊이 인식하고 제주도내 초중고대학에 제주어에 대한 특별교육 프로그램이 제도화되기를 바라고 싶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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