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素描)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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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아파트 모롱이 평상 가에 앉아 여기저기 바라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아파트는 압축된 공간이라 사방으로 열린 단독주택에 비해 풍경이 단조롭다. 무미한 일상에서 무늬 한둘 데생해 보고 싶게 됐다. 낱장을 차곡차곡 올려두면 되고, 색을 올리는 것은 나중 일이다. 흑백 영화처럼 색에서 떠나기로 한다. 검정 이상의 색은 없다. 기억의 곳간은 조금 어둠침침해서 좋다.

#불타는 꽃_아파트 둘레를 돌다 자지러지게 놀랐다. 숲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꽃이 군락을 이뤄 빨갛게 불타고 있다. 활활 불타는 꽃 사태. 색상환의 스펙트럼에 저런 빛깔이 있을까. 여태 본 적이 없는 진달래 종으로 보인다. 잘 익은 홍시 빛이거나 노을빛으론 묘사가 모자라다. 그것들에 붉은 물을 더 올린 진홍(眞紅)이다. 바짝 다가앉아 눈으로 어루만지며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꽃무릇 말고도 잎에 앞서 저런 빛 꽃을 피운다니. 빨갛게 불타 잎이 나올 엄두를 못 내겠다. 4월에, 나는 소년의 가슴으로 두근거려 집에 들어가는 것을 잊는데, 시간까지 멈추었다. 와서 보라고 가까운 이 한둘 부르고 싶다.

#어느 여중생_아내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책가방을 등에 진 한 여중생이 고개 숙여 웃으며 지나간다. 오랜만에 대하는 다소곳한 눈인사다.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하도 기특해 답례로 한마디 인사를 건넸다. 교복이 아닌 걸 보니 학교가 끝나고 귀가했다 학원엘 가는 모양이다. 나란히 앉아 얘기하는 우릴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글쎄다. 별것도 아닌데 그 애 눈엔 좋아 보였을까. 요즘 아이들이 버릇없다 운운하지만 그렇지 않다. 심성이 착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른들이 먼저 좋은 본을 보여야 하고, 또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선순환구조로 되면 사회가 훨씬 밝아질 것이다.

#검둥이 반려견_40대로 보이는 여성이 반려견을 끌고 지나간다. 덩치가 크고 새까만 검둥이다. 등과 배를 새빨간 천으로 두른 옷을 입혔다. 주인까지 검정 옷을 입어 무뚝뚝한데, 새까만 반려견에 빨강을 얹어놓아 다소 분위기가 밝다. 안 보이더니 잠시 뒤 쓰레기봉투를 들고 클린 하우스로 향해 가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말할 것 없이 반려견이 몇 걸음 앞서 있다. 봄이라 데리고 산책을 하는 건지 아파트에 반려견이 꽤 있어 보인다. 홀연 볼일을 치르면 기다렸다 종이로 싸 비닐봉지에 넣는 장면도 눈에 들어온다. 개는 짖어 존재감을 나타내는 짐승인데, 성대 제거 수술을 한다니 동물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화원 차량_오후 5시 전후해 오는 차량이 있다. 큼직한 승합차다. ‘연화원이라 적힌 이 차가 입구 쪽 아파트 앞에 멈추면 여자 요양사가 먼저 내려 한 할머니를 부축하고 운전기사도 뒤를 따른다. 연화원은 사찰 요양원 같다. 매일 이 시간에 차가 오는 것을 보면, 낮 동안만 요양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방식일 것이다. 차에서 내린 할머니, 연세 90이 넘었을까. 보폭이 짧은 데다 걸음 내딛는 횟수가 잦다. 가족에게 인도하고 나오자마자 차가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아침에 집을 나갔다 저녁에 가족에게로 돌아오니 그나마 다행이다. 노인이 생존해 있는 어느 날까지 이어질 것이고, 나는 이 시간, 연화원 차량을 확인하려 두리번거리게 될 것이다.

이 데생들, 마음속 화첩에 챙겨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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