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위에서
그 길 위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도시를 떠나기 위해 도시에 섰다. 오늘은 제주 올레 18코스, 원도심에서 조천 만세동산까지 걷는다. 올레꾼에게도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돌담마다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가 이슬을 머금고 반긴다. 걷기 좋은 안성맞춤 계절이다. 중앙성당 앞 골목길의 간세라운지에서 출발하여 김만덕 객주-삼양해수욕장-원담봉 불탑사-닭ᄆᆞ루-연북정-조천만세동산까지 19.8㎞를 걷는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산지천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뗐다. 사철 맑은 물이 흘러 바지런한 여인들이 줄지어 빨래하는 모습이 예쁜 물그림자 속에 떠오른다. 아득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올레꾼의 마음을 붙잡는다. 세상으로 열리는 제주의 관문인 제주항, 산지천에서 제주항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오래된 가로수들이 아름드리 드리워져 초록의 싱그러움을 더해준다.

인문학적 여정 순례길, 그 길에서 거상 김만덕을 만났다.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않고 차별을 받았던 조선 시대. 제주가 낳은 시대의 제약을 뛰어넘은 역사 속 신여성이 아닐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김만덕 삶의 일대기는 객주 평상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나그네를 숙연케 한다.

내친김에 김만덕 기념관을 찾았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조실부모하고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젊은 날, 객주를 차려 제주도 최고의 거상으로 거듭난 김만덕은 극적인 인생보다는 처절한 인생으로 각인된다.

제주항을 등지고 건입동 마을 언덕을 올랐다. 바람의 언덕을 오르며 뒤돌아보면 미지의 세계로 끝없이 펼쳐지는 해원의 바다가 올레꾼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한다. 항구를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는 비릿한 바다 내음 속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의 거룩한 삶을 더욱 기리게 한다.

세 번째 걷는 제주 올레길, 나에게는 인생 순례길이다. 꼭 멀리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좋다. 아침에 해가 뜨면 태아가 어머니 배 밖으로 나가듯 세상을 향해 걸어가고, 해 질 무렵이면 고단한 몸을 눕히기 위해 집으로 들어와 평화로운 하루를 정리했다. 마치 어머니 자궁으로 들어가는 모태 회귀본능처럼….

매일 천천히 걸었다. 이 길에서 살았던 삶들을 애써 기억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아름다운 천혜의 비경 속에 내딛는 걸음걸음은 바다로 닿아 수평선을 잇고 오래된 마을들을 연결하고 결국 사람에게로 돌아와 나에게로 가는 치유의 길이 되어 주었다.

오늘도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구름 따라 걷는다. 그 길들은 익숙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때론 설레는 미지의 길이기도 하다. 차가 없는 한적한 오솔길, 양심으로 사는 비닐봉지 귤,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를 주우면서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김만덕을 가슴에 품는다. 자신은 차별과 질시와 고난의 삶을 살았음에도, 자신을 무시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진정한 부자 의녀. 풀잎 같은, 스러지지 않는 들꽃 같은, 윤슬 같은 빛나는 삶은 문화와 스토리를 더해 귀중한 유산이 된다.

무르익는 봄날, 제주 올레길의 화룡점정은 단연 귤꽃 향기. 구불구불 이어지는 과수원 돌담 따라, 코끝에 와 스치는 귤꽃 향기 쫓아 걷는다.어느새 길 따라 이어지는 마을 초입의 거대한 현무암 이정표가 도시를 떠난 나그네를 반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