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주도하며 친일 동화정책에 반기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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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독립운동가 이신형
이신형, 광주학생운동 전개…민중시보 발간하며 내선교풍회 등 폭로
이양문, 대정현감 역임 중 대정현 무남·무녀 세금 경감해 폐단 시정
이양지, 제주 출신 부모 둔 재일교포 2세 소설가…日 문인상 수상 
이영복, 도쿄도 청년문학회원·제주신문 기자 활동…창작집 ‘밭당님’
이신형은 1929년 광주와 일본의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일어나자 광주고보, 전남공립사범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합동해 광주 시내 요소요소에서 항일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사진은 지난 2018년 이신형이 태어난 조천읍의 만세동산에서 전개된 3·1절 기념 행사 모습.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신형은 1929년 광주와 일본의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일어나자 광주고보, 전남공립사범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합동해 광주 시내 요소요소에서 항일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했다. 사진은 지난 2018년 이신형이 태어난 조천읍의 만세동산에서 전개된 3·1절 기념 행사 모습.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신형李信珩:1911(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광주학생운동 및 일본 오사카에서의 항일활동.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 입당, 본관은 전주, 이항우(李恒雨)의 아들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전남공립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 3학년에 재학 중인 1929년 7월 독서회중앙본부 산하 전남사범학교 독서회에 가입하였다.

이신형.
이신형.

1941년 동향의 규수 김정희(金貞姬)와 결혼, 이는 유명한 항일운동가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의 사위인 것이다.

그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살포,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법에서 3년 6월형을 선고받아 항소,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동 회원들은 동년 9월 중순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모임을 갖고 조직을 개편, 그는 조직교양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조직 강화에 힘썼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의 사이에 격투가 일어나자 광주고보 학생 300명과 전남공립사범학교 학생 및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합동하여 광주 시내의 요소요소에서 항일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학교에서는 11월 4일부터 11일까지 휴교를 한 후 12일 개교하였다.

그러나 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하던 그는 개교하는 날 첫 시간에 다시 동지를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동성(東成)구 동소교(東小橋) 북정(北町) 소재에서 민중시보(民衆時報) 발간에 참가, 이 신문은 항일운동의 거물 김문준에 의해 발간되고 있었다.

1935년 6월 15일 창간호를 발간하여 오사카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조로 민중 운동의 기관지 역할을 다하였다.

1936년 5월 26일 김문준이 옥중의 여독으로 순국하자 이신형이 이를 인계받아 주간(主幹)이 되어 동포의 도항문제, 차가(借家)문제, 노동문제 등을 다루고 내선교풍회(內鮮矯風會)의 친일적인 동화정책을 폭로하였다.

월 2회에 걸쳐 1회에 2500부를 발간하였다. 그래서 동년 9월 25일 그가 체포당하고 언론을 통한 항일 운동은 좌절, 일제의 강권으로 동년 11월 1일 ‘민중시보’는 폐간되고 말았다. 이 일로 그는 한진섭(韓辰燮)(김녕)과 함께 1936년 12월 18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되자 곧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의 중앙에 반대하여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한 당내 대회파를 지지하였다.

▲이양문李揚門: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1623년(인조1) 5월, 이익(李益)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26년(인조4) 2월에 떠났다. 재임 중 1623년 대정 유배죄인 정온(鄭蘊)이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어 상경하였다. 1625년 3월 조정에서는 대정현의 무남(巫男)·무녀(巫女)에 대한 세포를 견감하도록 하였다.

대정에 있는 신사(神祠)는 혁파한지 오랜데 무남·무녀에게 세포를 해마다 징봉하여 감당하기 힘드니 이런 폐단을 제거해 달라는 제주사람 김효의(金孝義) 등의 진정에 이러한 지시가 내려졌다.

▲이양지李良枝:1955(분단시대)~1992, 재일교포 2세, 여류 소설가. 37세로 요절, 일본식 이름은 다나카(田中淑枝).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에서 제주도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두호(李斗浩)는 모슬포<모실-개>에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어머니 오영희(吳永姬) 역시 제주태생이다.

1975년 4월 도쿄의 사립 명문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회과학부에 입학하였으나 6개 월 만에 자퇴하고 말았다. 1984년 봄, 우리 정부의 위탁생으로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 1988년 2월에 졸업했다. 1988년이야말로 서울대를 졸업하는 영예와 함께 소설 ‘유희(由熙)’가 제100회째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졸업 소감으로 “서울대를 나왔다는 것은 재일교포로서의 영광이며 이 학교를 다니게끔 해 주신 부모님과 한국문화를 일깨워 준 여류 명창 지성자씨, 그리고 한국정부에 무한한 감사를 올립니다.”며 눈시울을 밝힌 바 있다.

이양지가 9세 때에 온 가족이 일본에 귀화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민족차별을 심히 느낀 부모는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오직 한국이란 국적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보았으며 또 교포들이 “조선족”, “한국족”으로 갈라서 조총련과 민단의 싸움에 염증을 느낀 탓도 있었을 것이다.

1972년 고등학교 3학년에 진급한 후 중퇴해서 교토<京都>로 건너가 부립(府立) 압기(鴨沂)고등학교로 편입학하였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후 더욱 창작활동은 쉬지 않고 도서관에서 자신의 정열과 시간을 바쳤다.

어느 날 도쿄에서 한국의 명창 지성자(池成子)를 몇 차례 만나 얘기를 나눈 것이 한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다 깊이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벌써 그의 작품은 아쿠다가와상<芥川賞> 후보 작품으로 선정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1982년 ‘나비 타령’을 발표하자 일본 문학진흥회에서 심사하여 후보 작품으로, 또 1983년 ‘오빠’와 ‘해녀海女’를 발표하자 이 ‘해녀’가 아쿠다가와상 후보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이 상은 일본 문예진흥원에서 제정한 문학상으로 해마다 춘추 2회에 걸쳐 신인에게 주는 상이다. 지난해에 발표한 신인들이 작품을 심사하여 수여하는 상이어서 일본 문인들도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알고 있으며 이 상의 권위가 일본 문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서울대학의 학창생활은 작품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여, 1984년 작품 ‘각(刻)’을 발표, 이 작품도 아쿠다가와상 후보 작품으로 뽑혔다. 1985년에 작품 ‘그림자 저쪽’을, 또 이 해에 ‘갈색의 오후’를 발표하고 1986년에 ‘내의(來意)’, ‘Y의 초상화’를, 1987년에 ‘푸른 바람’을 발표하였다.

‘유희’는 중편소설로 1987년 일본의 문예지 ‘군상(群像)’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서울에 유학 온 여자 대학생 2세 ‘유희’가 모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갈등을 다루었다.

이양지의 작품이 아쿠다가와상 100회째 수상자라는 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혹자는 한국인이라서 이미 수상될 것을 민족적 편견에서 늦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이미 수상권이었으나 100회째로 주는 의미가 막중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늦춘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녀는 급성 심근염(心筋炎), 심부전증(心不全症)으로 1992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이영복.
이영복.

▲이영복李永福:1921(일제강점기)~?, 시인, 소설가, 본관 전주, 원적은 애월읍 금성리<목안:모실-개>, 순교한 목사 이도종의 아들, 그는 일본 도쿄 제1외국어학교 졸업, 도쿄도<東京都>청년문학회 회원, 청년작가사 동인, 제주신문 기자, 동 편집부장,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제주도문화재감정관 역임하였다. 창작집 ‘밭당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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