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 수국꽃길에 6·6사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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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여름으로 들어선 종달리에는 수국이 한창이다. 수국꽃길을 찾아 종달리를 찾는 사람들도 꽤나 많아졌다. 언제부터 종달리가 수국으로 유명해졌는지는 모르지만 화사하고 풍성한 수국꽃이 마을을 환하게 만든다.

종달리 입구 지미봉에 오르면 감탄이 또 저절로 나온다. 마을의 해안선 따라 알록달록 지붕이며 성산일출봉에서 우도까지 그냥 한 폭의 수채화가 눈앞에 탁 펼쳐지기 때문이다.

제주의 풍광은 어디서든 아름답지만 제주를 알아 가면 갈수록 너무나 처절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종달리 역시 그렇다. 지나간 시간이 아름다우면 추억이고 아프면 기억이라는 말을 한다. 4·3을 빼놓고 제주를 말할 수 없듯 역사 속의 종달리는 ‘6·6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곳이다.

1947년 6월 6일 구좌면 종달리에서 청년집회를 취체하던 경찰관 3명이 마을 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을 두고 세칭 ‘종달리 6·6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 새벽부터 보복 검거선풍이 시작된다. 직접적으로 사건과 관련 없는 마을 청년들까지 잡혀가서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을 받아 거짓자백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배령이 내린 지 두 달 만에 수배자 명단에 있던 70여 명의 청년들 중 44명이 체포되고 제주지방법원에서 벌금형에서부터 집행유예 및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종달리는 주목받는 마을이 되어 경찰, 서청 등으로부터 수난을 겪었다. 졸지에 종달리 마을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주목받는 마을이 되고 만 것이다. 더더욱 기막힌 것은 그중 몇몇이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 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시골마을 청년들의 모임을 과잉 단속한 경찰과의 충돌로 무려 40여 명이 재판을 받고 또 예비검속으로 다시 잡혀가 죽임을 당하다 보니 마을의 분위기가 어땠겠는가.

올해 4·3도민연대는 4·3봉기 이전인 1947년 미군정 당시 3·1사건, 3·10총파업, 하곡수매반대운동 등으로 체포되고 재판받은 피해자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다행히 희생자신고는 거의 한 편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4·3희생자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우리는 4·3과 관련 없어! 잘못 찾아왔어!” 단정하듯이 말하는 분도 계셨다.

그간의 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4·3수형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겪은 4·3 관련 내용을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법자, 전과자라는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고 가족들에게 연좌제 피해가 갈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6·6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10여 명인데 지난해 생존수형인인 고 아무개씨는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6·6사건은 대부분 벌금형과 집행유예 피해자들이다.

이처럼 제주섬 동쪽 바닷가마을 종달리에 4·3 관련 아픈 역사가 아름다운 수국꽃길에 깔려 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4·3특별법에 의해 희생자 1인당 9000만 원이 지급된다는 소식이 화제인데 이 노릇을 어찌하랴! 누구나 똑같이 9000만 원을 지급받지 못한다. 개정 4·3특별법은 사망자와 행불자에게는 9000만 원을 지급하나 벌금형 피해자는 3000만 원, 집행유예를 받은 피해자는 4500만 원 등 차등지급 한다는 사실이다.

수국향기 가득한 종달리에서 4·3수형인 실태조사를 하는 필자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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