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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휴식, 휴면, 휴지, 휴게, 휴가…. 쉼을 나타내는 한자어가 줄을 잇지만, 순우리말 ‘쉼’이 더 좋다. 쉼팡, 쉼터, 쉼표는 얼마나 가깝고 친숙한가. 잔뜩 졌던 짐을 부리고 난 뒤처럼 홀가분한가. 한자어의 난해함을 풀어놓는 것마저 쉴 수 있어야 참다운 쉼일 것이다. ‘쉬다’의 전성명사이니 문법적으로 한 점 흠결이 없는 깔끔한 조어다.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얽매이면 더욱 지칠 수밖에 없다. 일에 지나치게 치여 몸이 고단한 지경이 된 것이 과로다. 몸에 빨간 불이 들어온 상태다. 대처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는 수도 있다. 쉬어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일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슬기롭지 못한 일이다.

쉬면서 알맞게 일했다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불행을 불러들인 것은 터무니없이 일을 계속한 쉼 없는 나아감이었다. 지나친 욕심이나 분별없음은 끝내 더 나아감에 마침표를 찍고 만다. 만물의 영장답지 않은 어리석음이다.

뜨거운 여름날 오래 날다 숲 그늘에 날개를 접는 새를 보라. 나뭇가지에 앉아 한나절을 꼼짝 않고 낮잠을 즐긴다. 긴 쉼의 시간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먹이를 사냥했고 해의 온기를 온몸에 받아 활기차게 날았다. 다음의 쉼이니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영묘한 기획이고 체계적 실천이다.

쉼은 리듬이다. 생명을 재충전하기 위해 생체리듬을 확충하려는 것. 하던 일을 잠시 그만두는 것이다. 일을 계속했으므로 지쳤으니 몸을 편하게 두는 것이다. 잠을 잘 수도 있다. 잠은 쉼의 가장 쾌적한 수단일 수 있다.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쉼과 마음의 평안을 갖는 쉼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에게 ‘참된 쉼’을 주신 분이다(마 11:28-29). 하지만 늘 쉼만 가질 수 없는 일, 성도가 쉬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기도, 찬송, 전도, 감사, 말씀 교육, 진리를 지키는 일.

쉼은 휴지, 중지, 멈춤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중지는 복구되지 않는 stop이 아니다. 지친 몸과 머리를 쉬는 것, 일단 일에서 해방돼 적정한 쉼을 갖는 것이다. 일이나 훈련만큼 중요한 것이 쉼이다. 쉼은 결국 일의 능률을 위한 것, 훈련의 난도를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군대라 하지만, 쉼 없는 전투 훈련이 효과를 반감시킬 것은 불을 보듯 한 일이다.

문장도 군데군데 쉰다. 고비고비 돌아가려면 필요한 게 쉼이다. 긴 문장을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읽다 그 속에서 쉼표를 만나면 활자 속에서 꽃을 보는 것 같고, 숲속에서 옹달샘을 만난 것 같다.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는 문장의 맨 끝에 오지만, 그래서 쉼표(,)는 중간이나 낱말과 낱말 사이에 찍는다. 짧디짧은 찰나의 여유, 그 한 모금이 건조한 활자의 목마름을 축여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쉼표 사용을 꺼리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쉼표를 많이 쓰기를 내세운다. 석 줄 읽으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이즈음에는 더욱 한 점 쉼표에 감지덕지하는 형편이다. 일단, 정지해 행을 거슬러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부르는 말 다음, “지은아, 웃는 얼굴이 예쁘구나!”, 끊어 읽을 곳을 나타내 “어느 날, 그가 느닷없이 찾아왔더라.” 또 문장 순서가 바뀌었을 때 “바른 대로 봐라, 지선아.” 짝을 지어 구분할 때 “닭과 지네, 개와 고양이는 사이가 안 좋다.”처럼.

하물며 일에 부대끼는 사람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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