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단에서 쏘아올린 항일의거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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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민족사상 스님들 법정사로 모여
일제 감시 피해 항일운동 계획
항쟁 동참자 400명에 달했으나
日 경찰 진압에 이틀만에 마무리
희생정신 잇는 성역화 사업 추진
지난 2018년 거행된 제100주기 제24회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 유족, 학생 등이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지난 2018년 거행된 제100주기 제24회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 유족, 학생 등이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민족사상을 지닌 스님들 전국에서 한라산 법정사로 모여들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봉장 강창규(본적은 제주시 오등리이고 당시 주소는 안덕면 사계리임) 스님은, 근대 제주불교 처음으로 1892년 가사·장삼을 두른 출가자로 알려져 있다.
전북 죽림사라는 절에서 사미계를 받은 강창규는 1908년 창건된 한라산 관음사에서 제주의병항쟁(1909년) 시 의병장을 지낸 김석윤과 방동화 등을 만난다. 그리고 경주 기림사라는 절로 출가한 방동화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던 경북 영일군 출신인 김연일 스님 등을 만난다.
이후 김석윤·강창규·방동화 등의 주선으로 제주도에 온 김연일 스님이 법정사(1911년 창건)의 주지로 1914년 취임한 후, 민족사상이 투철한 여러 스님들이 법정사로 몰려든다.
항일의거의 기운이 최남단에서 최북단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한편,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의거계획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곳으로 여긴 국내의 여러 스님들이 항일운동 기반조성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18년 6월 김연일‧강창규‧방동화 세 사람은 제주시 산천단에서 의형제를 맺고, 항일거사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가고, 기림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김연일·방동화·김인수 승려 등이 제주시 산천단 근처에서 항일투쟁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가 심해져 감을 인지한 그들은 한라산 심산유곡에 위치한 법정사로 옮겨 가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법정사 스님들은 일본 제국주의 축출과 국권회복이라는 양대 목표를 세우고는, 김연일 중심의 지휘부와, 강창규 중심의 행동부로 나눠 구체적인 활동방침을 정한다.
5월경부터는 경북 영일군 출신의 승려 정구용이 합세하여 격문을 작성하는 한편, 법정사에서 무력항쟁 모의궐기대회도 가진다.
특히 8월 방동화 스님이 당시 제주에서 최고의 신도를 거느린 민족종교인 선도교 교주 박주석(한림읍 금악)을 만나 거사 참여를 요청한다. 박주석 선도교 교주가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범종교적인 연대가 이루어진다.
9월 들어 김연일 법정사 주지의 불무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후 본격적인 거사 준비에 들어간다. 10월 초 각 마을 구장들에게 격문을 발송하고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하는 한편, 이들을 지휘할 여러 대장을 임명하고 군 깃발을 제작하는 등 군대조직을 갖춘다.
드디어 1918년 10월 7일 새벽, 거사 인원 34명이 무력항쟁에 나서려 고지대에 위치한 법정사에서 내려와 여러 마을을 거치는 과정에서, 항일의거 동참자가 수백 명으로 불어난다.
한편 지휘부는 거사 당일 법정사에 머물며 총 지휘와 더불어 성공기원 기도를 올린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의거는 6개월간의 긴 준비 기간이 있었음에도 일본 경찰에 노출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의거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와 기대가 상당하였음을 의미한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전개 과정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당해 괴로워하고 있다. …. 1918년 (음)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음)9월 4일 대거 제주향(濟州鄕:제주시)을 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라는 격문을 법환동·호근동·영남동 등 여러 마을 구(리)장에게 돌리면서 10월 7일 새벽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의거는 시작된다.
무장투쟁 공격의 1차 목표는 서귀포 순사주재소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한다.
이 과정에서 강정천(큰내)을 지나 하원리에 이르자 항쟁에 참여한 의거자가 400명에 이른다.
승려와 불교도, 선도교도, 농민, 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항일투쟁 의거자들은 호미와 낫, 화승총 3정 등을 소지하여 강정마을을 거쳐 도순리로 가는 도중, 선봉장 강창규의 명령으로 전봇대 2본을 절단하여 제주 성내와의 통신을 차단시키고,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파괴하여 구금자 13명을 석방시킨다.
의거 소식에 놀란 일본경찰은 전라도 목포에 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강경 진압에 나선다. 결국 38명의 의거자들이 체포되고, 거사는 이틀 만에 막을 내린다.
법정사 항일운동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검거된 주요 의거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되어,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1919년 2월에는 31명에게 실형, 15명에게 벌금형이 선고된다.
재판 전에 2명, 수감 중에 3명 등 옥사로 5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8명이 불기소로 석방된다. 이러한 형량은 기미년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주역들보다도 더 무거운 형량이다.
주지인 김연일은 항일운동 1년 후인 1920년 3월, 선봉대장 강창규는 1922년 12월, 격문 작성자인 정구용은 1923년 2월이 되어서야 체포된다.
오랜 기간 의거자들이 체포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대중적인 지지가 컸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특히 강창규는 당시 중문주재소 방화를 지휘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6년으로 감형되지만, 의거자 중 가장 오래 복역했다. 강창규는 출옥 후에도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그 후 1943년 대정읍 동일리에 서산사를 창건하고 불도의 길을 걸었다.
강창규 스님에게는 2005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이, 강창규 스님과 함께 법정사 항일투쟁에 동참하였다가 투옥되어 재판 전에 옥사한 강창규 스님의 친동생 강수오 지사(1882~1918년)에게는 형보다 앞선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라산 영실 볼래(佛來)오름에 위치한 존자암과 고려시대 큰 사찰이었던 법화사와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 무오법정사는 원래 법화사의 산내 암자였다.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던 법정사는 초가집 형태의 사찰이었으며, 면적은 87.3평방미터로 작은 절이었다. 법정사는 1918년 10월 의거자에 대한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 있다.

법정사 가는 길.
법정사 가는 길.

▲무오법정사 성역화 사업 추진 과정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진실이 묻혀있던 항일운동 발상지인 무오법정사에 대한 성역화 사업은, 재판기록과 수형인 명부 등이 1992년 발굴됨에 따라 활기를 띠었다. 1994년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사업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이영민 외 25명의 주민들 이름으로 성역화 사업을 위한 청원이 있었으며, 1995년 중문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하였다.
1996년에는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치근)가 결성되어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는데, 2003년에 제주도지정문화재기념물(제61-1호)로 지정되고, 2004년에는 유족회(회장 방진주 스님)가 결성되고, 2004년에 드디어 400인의 합동신위와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 등이 준공되기에 이른다.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설된 의열사 본당에는 66명의 주요 의거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본적이 도외 출신 의거자로는 김연일·장임호·정구용 등 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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