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가지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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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초하의 더위가 불볕이다. 산과 들이 목마르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밭고랑이며 메마른 들을 바라보는 농심은 시름이 깊다. 그동안 나라는 선거를 치르느라 농민들의 고통은 뒷전이었다. 건조한 날씨로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산불로 타들어 가는 산림을 볼 때마다 울렁증이 생긴다.

중산간 들녘을 하얗게 수 놓는 찔레꽃, 수풀 속 햇고사리, 안개 자욱한 초저녁 인근 과수원에서 실려 오던 달착지근한 귤꽃 향까지.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봄 내음이다. 올봄엔 눅눅한 안개가 몰고 오던 감미로운 향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고사리장마가 여름 장마로 이어지던 게 기후 변화로 점점 비가 귀해진다.

근린공원 운동장 잔디는 누렇게 메말랐다. 회오리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마른 풀잎을 허공으로 말아 올린다. 생명감 넘치는 초록빛은 한낮의 피로를 눅이는 청량제였다. 봄 가뭄이 길어져 씨앗을 단 채 그대로 시들어 간다.

길가 군데군데 놓인 화분 속 꽃도 가을 풀잎처럼 누웠다. 심는 마음 못지않게 돌봐주는 배려도 따뜻했으면 좋을 텐데. 알록달록 어울린 화분은 오가는 이의 눈을 호강시키던 것들이다. 활짝 핀 모습만 보고 꽃을 다 보았노라 할 수 없다. 열매를 맺고 이울기까지. 꽃도 사람과 다를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다.

가로수로는 한여름 그늘을 넉넉하게 내려주는 나무가 좋다. 길을 걷다 그늘로 들어 더위를 식힐 수 있게 잠깐 쉼표를 찍는 곳이다. 동네 가로수인 하늘로 치솟기만 하던 야자나무를 뽑아내더니, 산딸나무로 바뀌었다. 온 산이 푸르름으로 짙어가는 오월 하순 무렵이다. 무성한 이파리 위에 별처럼 하얗게 얹혀 핀 꽃. 한 송이 브로치로 달고 싶을 만큼 우아해 탐이 난다. 더 자라면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이고, 가까운 곳에서 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가뭄으로 채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무는, 잎이 메말라가고 봉오리를 맺었던 꽃도 시들었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저 나무에 누군가 한 바가지의 물이라도 부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곤 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타인에게 바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대책 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사람도 목이 마른 데 오죽할까.

나눔이란 인간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상호관계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요긴하다. 인간이 자연에 얻고 뺏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와 필요한 존재로 공존해야 한다. 일손이 바쁘고 내 소관이 아니라고 관심 밖인가. 가끔 가게 앞에 조그마한 화분에 올망졸망 꽃을 심어 가꾸는 이를 보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꽃과 나무에 물을 주는 일은 자신의 마른 가슴을 적시는 감로수가 될 수 있을 텐데….

우리 사회가 점점 건조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먹고 사는 게 고달파 주위를 돌아볼 여우가 없는 걸까. 외로움을 타는 이웃에게 힘이 되는 한 뼘의 정이 절실한데, 한 조각 빵을 나눌 이웃이 귀해진다. 코로나19로 오랫동안 고립돼 피폐했던 가슴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을까. 이제는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할 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비가 내린다. 곳곳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고 산천초목이 흠뻑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몇 날 두고 내렸으면 좋겠다. 팍팍한 우리 가슴에도 단비가 내리길 고대한다. 산딸나무의 보이지 않는 환호성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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