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전 제주의 비극에 잃어버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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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무오법정사 아랫마을 영남리
옛 화전밭·우물 그대로 남아있어 
4·3 당시 최대 피해마을로 기록
주민들 당시 금방 끝날 거라 여겨
숨어있다 발각돼 억울하게 희생
커다란 팽나무와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의 표지석. 한라산 남쪽 아랫마을 영남리는 4·3 때 사라진 마을로 회자된다.
커다란 팽나무와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의 표지석. 한라산 남쪽 아랫마을 영남리는 4·3 때 사라진 마을로 회자된다.

▲무오법정사 아랫마을 영남리 가는 길

신록이 우거진 산록도로를 달리다 눈에 자주 띈 이정표가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이다.

영남동 주변에는 ‘무오법정사’뿐만 아니라 ‘시오름주둔소’라는 역사적 유적지도 이웃하고 있다.

한라산 남쪽 아랫마을 영남리는 4·3 때 사라진 마을로 자주 회자되는 ‘화북의 곤을동과 동광리의 무등이왓’과 더불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고 아프게 하는 이름이다.

무주선원(영남리 무주정사 내부).
영남리에 있는 무주선원.

한때는 지명으론 남아있으나 주민이 한 사람도 살지 않은 마을로 ‘영남리’가 제주도에서 유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영남리에는 1960년대부터 외지에서 들어와 대를 이어 거주하는 전대희(1952년 생)씨 형제와, 영남리 마을에 들어선 무주선원라는 암자에 여승 한 분이 살고 있다.

답사팀은 전대희 님의 안내로 지금도 물이 고이는 우물 등 영남리의 옛 가름 도처를 누볐다.

영남리에 있는 많은 우물 중 하나.
영남리에 있는 많은 우물 중 하나.

영남리 마을 사람들은 초기에는 목축과 더불어 화전(火田)을 일구어 비탈진 곳을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주 작물은 조·고구마·메밀·콩·산디 등이었다. 마을에는 계단식 화전인 다랑이 밭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올레와 대나무가 무성한 집터와 밭담, 여러 곳의 우물과 통시도 그대로 남아있다.

울창한 팽나무 아래에는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이 숨은 듯 있고, 그 앞에 서면 당시 주민들이 경작했던 농경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남리 마을은 행정구역상 과거에는 중문면 영남리로, 4·3당시는 중문면 강정2구로, 지금은 서귀포시 용흥동에 속해 있다.

영남리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제2산록도로 ‘잃어버린 마을 영남동’ 이정표에서 경사 급한 도로를 따라 아래로 300여 미터 내려가면 정겨우면서도 아픔이 서린 마을 옛터로 들어선다.

또 하나는 서귀포 신시가지 우회도로를 따라가다가, 용흥마을로 들어서는 지경에서 북쪽으로 난 좁은 길로 한참 오르다 만나는 삼거리에서 동쪽 길로 가다 보면 영남마을에 닿을 수 있다.

▲4·3이란 광풍이 휩쓸고 간 마을 영남리

19세기에 마을이 들어선 영남(瀛南)리는 영주산인 한라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오래전 사람이 살지 않던 이곳에 화전농경으로 소득이 늘자 제주도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단다.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 서당을 차릴 정도로 아이들의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1898년 일어난 방성칠 난, 1901년의 이재수 항쟁에도 참여했던 영남리 주민들은, 화전을 일구는 열정 못지않게 미래의 밭을 일구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시에는 영남리 주민 6명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 중 옥사한 김두삼 님은 1995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추서되기도 했다.

한때 50여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기도 했던 마을이 영남리였으나, 일제의 해안중심의 식민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이 해안마을로 옮겨가, 4·3 당시에는 20여 호 1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이 마을에 4·3 당시 군경이 난입하여 주민 50여 명을 학살하고 온 마을을 불태워버렸다. 1948년 11월 18일 토벌대의 소개령이 내려지자, 마을 주민 대부분은 해안마을로 내려가기보다는 사태가 금방 끝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을 위쪽의 ‘어점이악 왕하리·내명궤·땅궤’ 등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토벌대에 붙잡혀 학살되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산간마을인 영남리를 유격대의 은신처로 여긴 군경에 의해 자행된 무차별 초토화 작전으로, 영남리 마을은 전소되고 주민 태반이 억울하게 이승을 하직해야만 했다. 인구비율 희생자 숫자로는 4·3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대나무가 우거진 영남리길.
대나무가 우거진 영남리길.

▲영남리 마을의 4·3 잔혹사

11월 20일 토벌대가 영남리 마을 도처에 불을 놓아 폐허로 만들자, 살아남은 주민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왕하리 냇가에 움막을 지어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민 일부는 1949년 1월 2연대 1중대와 서귀·중문경찰과 민보단 합동 토벌 시에도 희생당해야 했다.

서귀포 주둔 육지출신 토벌대는 토벌과정에서 잔혹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시신의 목을 잘라 등에 져 오게 하고, 숨어 지내던 여성의 옷을 벗겨 희롱하는 게 다반사였다 전한다.

특히 육지출신 어떤 군인은 땅궤에 숨어있는 영남리 처녀를 살려주겠다며 어점이 주둔소로 데려가 국부를 엠1소총으로 쑤셔서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다.

당시 서당훈장인 김봉성(색달리 출신)은 1949년 초 어점이악 근처의 궤에 숨었다가 군경민 합동토벌대에 잡혀 그 자리에서 죽창으로 난자당해 희생되었다.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훈장에게 글을 배웠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훈장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어야 할지도 모를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면서 죽였다 한다.

무오법정사 항쟁에도 참여했던 영남리 출신 이자춘 선생은, 4·3 당시 마을 근처 야산에 숨어 지내다가 군경토벌대에 희생되기도 했다. 4·3을 거치면서 영남마을 주민 태반 이상이 희생되었으며, 마을은 완전히 초토화되어버렸다. 주민 대부분이 대가 끊겼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동들은 고아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끔찍한 사건을 잊으려 고향 영남리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강정·용흥·도순·법환 등지로 흩어져서 살아가야 했다. 이제는 강정동에 살았던 고 김종원(1935년생) 님을 마지막으로 4·3을 경험한 영남리 주민 모든 분이 세상을 등졌다.

다음은 김종원 님이 4·3 당시 영남리 마을의 비극을 증언한 한 대목이다.

‘숨어 살았던 동굴에 토벌대가 총을 쏘아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나무에 불을 붙여 연기로 실신시킨 뒤 한 사람씩 끌어내 모두 총살해 버렸습니다. 그 겨울 몇 달 동안 일가족 15명이 다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영남마을은 지금 온통 삼나무·동백나무·산뽕나무·대나무 등이 보여주는 짙게 푸르고 슬프게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사이로 나 있는 옛길과 대나무 무성한 집터와 돌담·우물·통시 등이 마을의 슬픈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대나무 숲속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새 소리가 마치 4·3 때 죽어간 이들의 넋을 부르는 듯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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