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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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장맛비 사이로 반짝 얼굴 내밀었던 햇살이 이내 자취를 감춘다. 하늘은 깡충 뛰면 금방이라도 머리가 닿을 듯 꿀꿀하게 내려앉았고, 눅눅한 기운 따라 마음자리도 같이 젖어든다. 오락가락하는 빗날씨 속으로 잠시 하늘의 표정을 읽어보려 고개 들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의 표정을 읽어내기가 만만찮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눈이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몸이 얼른 읽어낸다.

문득,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몸은 움직임 따라 뼈마디가 뚝뚝 소리로 나이를 말하며 이내 축 처진다. 날씨 탓일까 생각했는데 그도 잠시, 세월의 무게를 감당키 어렵다는 몸의 언어다. 얼마 전, ‘뭐든 계속 먹고 싶고 잠도 많아 잔다면 장마철 우울증일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장마철 우울증은 햇볕을 많이 못 쬐게 되면 행복 호르몬이라는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든다고 한다. 게다가 우중충한 날이 계속되면서 수면을 유도하는 호르몬 분비량이 늘어 자연스레 우울해지고 잠이 는다는 것이다. 보통 우울증이 생기면 입맛이 떨어지고, 밤에 잠을 설치는데 장마철 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반대 양상을 띤다고 한다.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

꿉꿉한 날씨에 늘어져 있다가 움직였다. 올레길이라도 좀 걷다 와야 정신이 날 것 같아 가볍게 준비하고 나섰다. 도심 속 하천 따라 만들어 놓은 올레길.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 온통 때늦은 산수국이 요란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산산이 내린 비에 몸을 씻었는지 색깔마저 선명하다. 파란색 꽃잎 위로 햇살이 닿자 보석이라도 뿌려 놓은 듯 수국은 꽃 펼친 자리마다 반짝인다. 양 옆, 왁자하게 핀 꽃들 사이로 생각지 않게 꽃길을 걷는 호사를 누렸다.

저만치 걷다 보니 수풀 무성한 사이로 알알이 익은 산딸기가 푸른 잎들 속에서 점점이 붉게 영글어 온통 눈길과 손길을 유혹한다. 한동안 그 누구의 손도 안 탔나 보다. 투명하게 붉다. 손을 내밀어 몇 알 따는데 이런. 안쪽을 보니 크고 잘 익은 것이 있어 팔을 뻗을 때였다. 이도 보호본능일까. 조심한다고 했으나 사납게 가시를 세워 외부의 침입자를 가차 없이 덮친다. 가시에 찔리는 바람에 엉겁결, ‘아야’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있던 너댓 알을 얼른 입에 털어 넣었다. 아깝다. 눈으로도 먹어야 했는데 말이다. 자잘한 게 점점이 박힌 씨들이 입 안에 남아 잇속을 간지럽힌다.

주변을 곁눈질하며 쉬엄쉬엄 걷는데도 후텁지근한 날씨에 경사도 따라 옮기는 동작마다 온몸이 땀이다. 덥다. 변칙 장마란 말을 매스컴에서 쓰고 있다. 기존의 장마철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변덕이다. 지나던 바람도 더위를 타는지 동작들도 모두 일시정지 상태다.

연초록 사이로 커다란 산뽕나무와도 마주했다. 손톱만큼씩 검고 진한 오디가 종종이 매달려 있다. 가지를 잡아당기자 이파리에 고였던 빗물이 후드득 소리로 떨어지고, 달렸던 열매들이 겁결에 바닥으로 와르르 곤두박질이다. 이런, 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놓았다 다시 당기는 바람에 이파리 위에서 놀던 빗물과 함께 까맣게 달렸던 오디들도 수직 강하한다.

장마철 햇살이나 한 줌 얻어 볼 요량으로 가볍게 나선 길이다. 무엇 하나 내준 것 없는데 산열매며 계절의 색깔 등 쥔 것이 많다. 눅눅한 우기에 건진 짧은 한나절 속의 여유, 계절의 들판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여름걷이를 하게 되었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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