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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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운 시조시인

비가 내린다. 지난밤 방송에서 새벽부터 비가 시작되어 오후 늦게까지 내리다 밤이 되어서야 그친다고 했는데 예보대로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정해진 일정이라 비가 오는 날씨지만 개의치 않고 일단은 집결 장소에 가기로 한다. 우의에 우산까지 준비하여 갔다. 일행 중 몇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조금만 더 기다리다 출발하기로 했다. 참석 인원이 예전만 못하다. 비가 와서 그러기도 하겠다.

기다리는 동안에 목적지를 의논하다가 계획한 대로 수악길을 걷기로 했다. 새벽부터 비가 오고 밤이 돼서야 그친다는 일기예보를 신뢰하면서 한라산 남쪽에는 비가 조금 덜 내린다는 그 예보도 믿기로 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부슬부슬 오던 비는 목적지에 가까울수록 주룩주룩 더 힘을 쓰며 내린다. 수악길 입구에 다다르자 난데없이 폭우로 돌변한다. 고민할 것도 없이 수악길을 포기하기로 하고 드라이브도 할 겸 가벼이 오를 수 있는 성읍리 영주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성로로 들어서자 좔좔좔 쏟아지는 빗줄기가 조금씩 사그라진다. 그래도 다시금 돌아갈 염두가 나지 않았다.

서성로 고사리 축제장 옆 한남리 내창 생태문화 탐방로를 잠깐 들리기로 했다. 용암 바위, 절도된 밭, 용암 제방, 새끼줄 용암, 용암 수로 등 주로 용암이 흘러간 흔적이 넘쳐나는 하천을 낀 길이었다.

내리는 비를 우의와 우산으로 맞서며 걸었다. 흠뻑 젖은 나무를 만져보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이리저리 주변을 톺아보며 걸었다.

숲속의 풀꽃들이 대부분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 초여름에 아주 조그만 꽃을 만났다. 푸르름이 절정인 6월 숲 그늘에 그것도 비가 오는 숲 그늘에 살짝 노란빛을 띤 하얀 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이런 풀꽃이 숲길을 걷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동행한 k형이 노루발이라고 일러준다. 가느다란 꽃대 위에 몇 개의 꽃을 피워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살짝 노란빛이 도는 하얀 꽃을 피운 노루발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그래서 소녀의 기도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도감을 찾아보았다. 노루발은 전국 산지의 그늘에서 자라며 흔히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잎은 밑동에서 밀생하고 넓은 타원형으로 길고, 높이가 20~25정도 자란다. 꽃은 6~7월에 황백색으로 피며 총상꽃차례로 달린다. 열매는 삭과로 납작한 원형이며 9월에 익으면 5갈래로 갈라지고 갈색으로 된다. 겨울에 푸르른 잎을 간직하고 있어 동록(冬綠)이라고도 한다.

겨울 그 푸르름에서 강인함을 배우고, 먹을 것 없는 계절에 노루에게 온몸을 내어주는 보시를 배운다. 눈 덮인 겨울이 기다려진다. 가서 그 푸르름을 보리라. 기다리는 그 행복이 마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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