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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아파트 뜰을 거니는데 얼마 전에 옮겨심은 수국이 염천에 고사하는 몰골이다. 작아도 꼭지에 두어 개 꽃을 본 것이다. 보랏빛 꽃이 땡볕에 맥없이 시들어 간다. 시기를 놓쳐 기사회생하기는 틀린 것 같아 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파트에 무얼 새로 심는다는 것은 섬세한 배려지만, 관리의 손이 거기에서 멎어 버린 것은 뜻밖의 낭패를 부르니 이런 이율배반은 없다. 아리따운 한 생명이 숨을 놓고 있지 않은가.

올여름엔 제주가 유난히 덥다. 대구보다 최고기온이 높은 35도를 기록한 날들이 있을 정도다. 해양성 기후라는 기상 논리에 이변이 온 게 분명해 보인다. 6월에 이미 열대야가 오고 연일 폭염주의보다. 인간이 지구에 죽을죄를 짓지 않고서야 이런 형벌이 있는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온실가스의 배출만 해도 낯없어 눈을 질끈 감아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아닌가.

걸음을 떼어 놓는데 화단 가장자리에 한 무리를 이뤄 무성한 쑥 군락에 눈이 간다. 한 달 이상 가물어 웬만한 푸나무는 목말라 허덕대는 판인데, 녀석들은 무더기로 우쭉우쭉 겨루며 키를 키우고 있다. 아래 잎새들이 시들었을 뿐 위로 오르며 푸르죽죽 왕성한 활력 덩어리. 믿어지지 않게 활기차지 않은가. 여름 가뭄과 폭염을 당해 봐야 녀석들의 근기를 안다.

오래전 읍내 동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뒤란에 텃밭을 냈던 적이 있다. 볕이 잘 들고 울타리와 집 벽 사이라 큰바람을 막아 주니 텃밭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무릎을 치며 삽을 꺼내 들었다 기겁했다. 20평에 차지 않아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가로막아 나선 쑥과 망초 군락. 그때도 요즘같이 오랜 가뭄으로 삽질 한번 하면 흙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녀석들은 끄떡 않고 한여름 불볕 아래 퍼렇게 여유롭다.

호미를 찾아 들었다. 망초는 밑동이 굵어 있었지만 뿌리가 얕게 벋어 어렵잖게 뽑혔다. 호미로 조금 파 손으로 잡아당기면 순순히 뽑혀 나온다. 한데 쑥은 달랐다. 호미로 파헤치며 잡아당겨도 꿈쩍 않는 게 아닌가. 힘을 다해 당기면 끊어지기는 하나 그건 땅속으로 기어들어 간 줄기의 윗부분에 불과했다. 더 깊숙이 수직으로 내려들어 그것들은 다시 수평으로 외연을 넓히며 세를 확장하고 있다. 놀랐다.

호미로 파고 쪼고 내리쳐도 좀체 끊기지 않는 지독한 응집력과 착근력이 사람에게 엄청난 저항의 힘으로 버텨 오는 게 아닌가. 볕은 따갑지 바람 한 점 없는 여름 하오의 푹푹 찌며 올라오는 복사열에 두 손 들 뻔했다. 쑥처럼 강한 식물을 처음 보았다. 겉으론 땅속에 숨겨놓은 그들 비장의 방어기제를 어찌 알랴. 쑥의 옆으로 벋으며 자라는 땅속줄기의 맹렬한 생명력이라니.

이른 봄 일찌감치 돋아나는 어린 순을 뜯어 버무리며 떡을 만들어 먹고, 한방에선 쑥뜸으로 병을 다스리기도 한다. 아 참, 아잇적에 들에서 전쟁놀이하다 머리를 다쳐 피가 흐르면, “쑥을 뜯어라” 하고 쑥을 손바닥에 넣어 비벼 싸매던 일이 떠오른다. 상처를 소독하는 성분이 들어있다 한다.

여름밤, 모기가 극성일 때 마당에 깐 멍석 발치에 화톳불을 피우려면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게 말린 쑥 줄기였다. 모기를 쫓는 데 한몫을 했던 것이다. 웬만한 힘에 휘둘리지 않는 땅속줄기인데, 그 그악한 근력에 왜 비상한 약효인들 없겠는가.

쑥을 볼 때마다 땅속을 장악하는 그들 땅속줄기의 다발로 엉킨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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