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양항, 탐라 불교 부흥 최전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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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마을 중길·존장물, 불교 발원지인 존자암과 깊은 관련 
포구서 발견된 법화사 주춧돌…제주불교 발전 기여 가늠케 해
복원된 존자암. 영실 서쪽에 있는 볼레오름 해발 약 1200m 지점에 있다.
복원된 존자암. 영실 서쪽에 있는 볼레오름 해발 약 1200m 지점에 있다.

▲제주삼현도에서 본 존자암과 대포

1750년경에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첩인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를 보면, 백록담 남서쪽 한라산 바로 아래에 절이 그려져 있다. 사찰 이름이 없어 확실치는 않지만, 위치상으로 보아 존자암으로 판단된다. 존자암의 정남쪽 해안가에는 대포촌과 대포연대가 표기돼 있다. 저 멀리 남쪽으론 유구(琉球, 오키나와)·안남(安南, 베트남)·섬라(暹羅, 태국)·여인국(女人國, ?)·만랄가(萬剌加, 말레이시아) 등도 보인다. 당시 선조들의 지리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제주삼현도에 존자암과 대포가 그려져 있다.
제주삼현도에 존자암과 대포가 그려져 있다.

▲천혜의 양항(良港) 대포포구

대포포구의 지세를 보면 남쪽은 태평양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북쪽에는 한라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동서쪽에는 좌청룡 우백호에 비견되는 구릉지들이 대포포구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대포포구의 서쪽에 ‘자장코지’, 동쪽에 ‘모살넙개’와 ‘큰여또’에서 뻗어 나간 수많은 바위와 여(礖)들이 포구를 감싸고 있다. 이들 거대한 바위들은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천혜의 양항(良港)이다.

▲대포포구에서 존자암으로 가는 중질

존자암은 영실 서쪽에 있는 볼레오름(佛來岳)의 해발 약 1200m 지점에 있는 암자이다. 존자암은 존자가 수행했던 암자를 의미한다.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됐던 홍유손의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에 따르면 “존자암은 삼성[三姓: 고․양․부]이 처음 일어날 때 만들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탐몰라주 존자도량(耽沒羅洲 尊者道場)’이라 하여 존자가 탐라에서 수행하면서 불교도 전했다고 한다. 석가의 16존자 중 여섯 번째 발타라 존자가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탐몰라주(탐라)에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을 거쳐 고구려, 백제로 전파된 북방불교보다 인도에서 탐라로 남방불교가 먼저 전파된 것이다. 그렇다면 발타라 존자는 인도에서 탐라까지 어떻게 왔을까. 가야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후가 바닷길을 이용하여 김해까지 왔던 것처럼 발타라 존자도 배를 타고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탐라까지 왔을 것이다.

존자암에서 남쪽을 보면 대포 일대의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존자암의 원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현재 위치에서 봤을 때, 대포포구와의 거리는 약 12km 정도이다. 존자암에서 대포가 가장 가까운 포구이다. 구전에 의하면 대포포구에서 존자암까지 가는 길이 있다. 포구에서 ‘소꼬물동산’을 거쳐, 회수의 ‘볼래낭동산’을 지나 존자암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볼래낭(佛來南)동산’은 볼레오름(佛來岳) 남쪽에 있는 동산으로 대포와 존자암을 오갈 때 스님들이 쉬었던 언덕이다(서귀포시, 1999, 서귀포시지명유래집). 대포 어르신들은 지금도 이 길을 ‘중질(중길, 僧路)’이라 부른다. 대포포구에는 ‘존장물(尊者水)’이라는 용천수가 있다. ‘존자가 오가면서 마셨던 물’이란 의미다. 이러한 것으로 미뤄볼 때, 대포마을은 제주불교의 발원지로 알려진 존자암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자암 세존사리탑.
존자암 세존사리탑.

▲대포포구에서 발견된 법화사 주춧돌

대포포구에서 북동쪽으로 약 3.4km 떨어진 법화사는 하원의 중산간 지대에 있다. 법화사는 통일신라 때 장보고에 의해 개창된 절로 알려져 있다. 장보고는 법화 사상을 바탕으로 동북아 해상왕국을 구축하고, 중국의 산둥반도, 적산촌과 양자강 하류, 완도에 법화원(法華院)을 창건하였다. 탐라의 법화사도 장보고가 동북아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창건했다는 것이다.

법화사는 고려 때 국가적인 차원에서 웅장한 사찰로 중건된다. 원종에서 충렬왕 때까지 11년간(1269~1279년)에 걸쳐 재건된 법화사는 당시 국제적으로 보기 드문 대사찰이었다. 충렬왕의 왕비인 장목황후의 원찰(願刹)로 국찰(國刹)의 위상을 지녔다. 장목황후는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딸이다. 따라서 법화사는 고려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제국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몽골은 동북아 해양 진출의 전략적 가치와 목마장의 적지임을 간파하여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100년 가까이 직접 식민 통치했다. 그런 과정에서 고려와 몽골의 지배층은 탐라와 법화사에 자주 출입했을 것이다.

법화사가 중창될 때 사용됐던 주요 건축 자재들은 한반도에서 공수되었다고 한다. 법화사에서 출토된 용과 봉황이 그려진 막새는 한강 이남에서 발견되지 않은 귀중한 유물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 건물지의 유물과 동일하다고 한다.

해발 170m 정도의 중산간 지역에 있는 법화사를 고려가 중건할 때 건축자재를 실은 선박과 인물들은 어디로 출입했을까. 최근 대포항을 정비하다 법화사지의 주춧돌과 동일한 주춧돌 3개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법화사 건축 관련 자재와 인물들이 출입한 관문은 대포포구였음이 증명된 것이다. 지금도 대포항에서 법화사로 가는 길이 있다. 대포항에서 ‘중질’을 따라 올라가다가 ‘소꼬물동산’ 근처에서 북동쪽으로 가는 길이다.

대포포구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속칭 ‘절터왓’이 있다. 과거에 절이 있었던 일대로 존자암과 법화사 가는 ‘중질’의 지척에 있다. 이곳의 토지주 고영진 씨(작고)는 밭을 정리하다 고려청자 등을 발견하여 제주도에 신고한 바 있다. 이처럼 존자암, 법화사, 절터왓 등의 유물 유적, 지명 유래 등을 고려해 볼 때 대포는 제주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배가 드나들었던 대포

대포포구에서 동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배튼개’라는 바다가 있다. 배를 띄운 바다라는 뜻이다. 과거 이곳에서 대국(중국)으로 말을 보냈고, 조선 때 대포 일대와 국영 목장인 8소장에서 키운 말을 진상하거나, 타지로 몰래 보냈던 곳이라 전해진다. 말을 몰고 내려왔던 ‘질’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대포포구에 대국(중국) 배들이 출입했다고 한다. 이에 대포를 ‘당포’라 불렀다고도 한다. 배가 오가면 물자도 오간다. 따라서 대포포구와 배튼개를 통해 주변국과 교역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순조 1년(1801년)에 당포에 여송인(필리핀인) 5명이 표류했었는데, KBS역사스페셜에서는 이를 대포항으로 보고 있다(KBS, 조선시대 홍어장수 표류기 세상을 바꾸다, 2009.8.8.방영).

고대 항로 뗏목 탐험대 장보고호.
고대 항로 뗏목 탐험대 장보고호.

▲뗏목 학술탐험대 장보고호의 바닷길 탐사

동아시아의 고대 항로를 탐사하는 뗏목 장보고호(대장 윤명철 교수)가 2003년 4월 23일 대포항을 출항하여 13일 만에 일본 규슈에 도착했다.

장보고호는 항해 중 거센 돌풍과 풍랑으로 표류했음에도 바람과 해류를 따라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이로써 대포항은 주변국으로도 갈 수 있는 바닷길의 길목임이 증명됐다.

글=지리학박사 김오진(질토래비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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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담 2022-09-19 17:11:13
허황후는 기원후 사람입니다.
그럼 부처님시대부터 약 600년 차이가 있는데
이게 가능한지요.
역사는 팩트지 소설이 아닙니다.
지리학박사님까지 이런 앞뒤 안맞는 글을 쓰게하는
불교 현실이 씁쓸하네요.

구담 2022-09-19 17:07:53
어지간하면 댓글 안쓰는데 해도 해도 너무 심해서 글을 올립니다.
삼현도에 그려진 절이 존자암으로 보이세요?
왼쪽에 고근산, 오른쪽에 병악이라고 나와있고 절 옆에 목장이라고 친절(?)하게 표시했잖아요.
누가봐도 법화사로 보이는데.
그리고 중질은 스님들을 비하한 중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당근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생겨난 말이겠지요.
그리고 어디 존자암과 대포동을 갖다 붙이십니까?
대포동은 설촌이 16세기입니다.
대포동 존장물이라고도 하지만 존작물 또는 종장물로도 불리웁니다.
그냥 본인 편한대로 막 붙이지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발타라존자가 허황후처럼 배타고 왔다고요?
부처님 시대인 기원전 600년경에 제주도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데 배를타고 여기까지 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