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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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온다. 채 걷히지 않은 먹구름 사이로 그래도 동쪽 하늘은 조금 밝다. 비옷과 우산, 텀블러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비가 자주 내리니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있다. 번영로를 타고 남조로로 접어들었다. 갑자기 장대비가 내린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비는 부슬비가 되었다. 궂은 비 오는 날씨에 안전은 걱정되지만 기다리는 정상 모습에 설렘을 감출 수가 없다.

이른 아침이라 인적도 뜸하다. 숲속은 비를 맞아 세수한 듯 영롱했다. 길섶 풀잎마다 한껏 물기 머금은 초록 쟁반에 은구슬이 대롱대롱 맺혀있다. 둔탁한 등산화 울림에 어쩌다가 떨어질세라 맨발 깨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피아노 건반처럼 곧게 깔린 나무판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니 물영아리오름이 시야에 훅 들어온다. 여기가 늑대와 소년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라나. 오늘은 늑대 소년 대신 부슬비에 누런 소들이 목을 축이러 나왔다. 물영아리 정상은 은빛 안개에 둘러싸여 이름처럼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녹아난다.

어느덧 입구, 두 갈래 길에서 물영아리 정상을 향한 직선의 계단 길 대신에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나직나직한 오름길을 택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 나는 시간과 동떨어진 느린 황소의 길을 걷기로 했다. 무릇 자연이 그러하듯 소박한 오름 하나에도 가르침을 준다. 오르려 애쓰지 말고 언젠가는 내려오는, 모두 수평이 되어 돌아가는 인생임을 깨닫게 한다.

삼나무 층층 우거진 가지 사이로 물빛 하늘이 흔들린다. 쭉쭉 뻗은 나무들은 근위병처럼 줄 맞춰 나를 맞아준다. 비에 젖은 건지 땀에 젖은 건지, 내 몸은 어느새 흠뻑 젖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숨겨왔던 숲이 역동적인 숨을 내뿜는다. 피톤치드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숲이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 순간만큼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

능선따라 걷다가 정상이 어디쯤인가 가늠하려는데, 전망대가 떡하니 시야에 나타났다. 그다지 높은 고지도 아닌데 주변 안개 속 풍광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련히 줄지어 있다. 안내판에 적힌 오름을 세보니 족히 스무 개나 된다. 오름 군락이다. 가시리와 제주 동부의 오름들, 풍력발전기까지 가물가물 보인다.

잠시 긴 호흡을 하고 물영아리 뒤쪽 계단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름도 예쁜 물보라 길이다. 여름새가 지저귀고 작은 바람이 잠자는 숲을 깨운다. 천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몽환적 신비로움에 빠져든다. 나오길 참 잘했다. 또 큰비가 내렸다. 솨솨, 숲에서도 바닷소리가 난다. 우산에 떨어지는 묵직한 빗방울 연주를 들으며 자박자박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주한 숲은 갈수록 깊어져 마법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계단을 밟고 오른 지 20여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영화처럼 습지가 펼쳐졌다. 예상한 대로 아련한 물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마주했다.

잠시 잊었던 이곳,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습지의 촉촉함은 지친 삶을 토닥토닥 위로해준다. 분화구를 향해 손을 뻗은 나무들이 뚝뚝 물기를 떨어뜨리고, 윤슬은 초록으로 빛을 발한다. 한참 동안 습지 풍광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백발노인이 나타나 잃어버린 소를 불쑥 내밀며 말을 걸어올 것 같다. 숲은 가만가만 존재하였지만 언제나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나는 동화 속 마법의 숲을 가슴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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