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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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았다. 앞으로 5년 동안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만료되는 기간을 앞두고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반납하고 싶은 마음과 한 번 더 갱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교차했다. 자격증인데 없애면 다시 갖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허증의 새 사진은 현실과 비교된다. 신구 면허증의 대조는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매일 거울에서 마주하기보다 현실적이다. 이렇게 변해가고 있구나. 쓸쓸한 감정이 들지만, 세월을 거슬러 갈 수 없다며 다독이곤 한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젊은 시절은 웃고 있는 모습조차 낯설다. 타지에서 필요할지 몰라 공항에서 탑승 수속 중, 신분증을 운전면허증으로 대신하곤 했다. 자격지심일까. 다른 사람처럼 훑어보는 것 같은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수십 년 전이다. 앞으로 운전을 못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남편의 닦달에 억지로 면허시험을 봤다. 힘들게 운전면허증을 받고 하늘의 별을 딴 것처럼, 대견해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다고 운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새 차를 뽑아 놓고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아, 가슴이 뛰는 울렁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친가, 외가에서 물림처럼 내려오는 차멀미가 유별해 차를 타는 게 고통스러웠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돌고,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횟배 앓는 사람처럼 누런 얼굴로 고생했다.

이런 내가 감히 운전이라니. 두 아이 등하교 뒷바라지에 어쩔 수 없이 가슴 졸이며, 졸업을 시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실력이 늘었다. 차만 봐도 두려웠던 처지에 태어나 가장 잘한 게, 운전을 배운 것이라고 여유를 부릴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제주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넣고 가슴에 품었다. 자동차와 한 몸이 되어 신나게 달릴 때의 짜릿함을 맘껏 즐겼다. 운전하지 않았다면, 제주의 깊은 속살을 어찌 만날 수 있었으랴. 가슴 뛰는 희열은 제주에서 산다는 자긍심을 키웠다.

모두 한때의 추억이다. 이젠 감흥이 무디어졌다. 최근 들어 차를 움직일 일이 드물다. 세워두는 날이 더 많다. 전에 없이 운전하기가 부담스러워진 점도 있다. 넘쳐나는 차량으로 복잡한 도로에 차를 갖고 나가기가 피곤하다. 주차 문제도 쉽지 않다. 버스를 타거나 급하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으로 운전에서 해방된 자유를 누리곤 한다. 운전할 때는 늘 앞만 보고 달렸다. 버스에서 지나치는 풍경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여유를 즐기거나, 신경 쓰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택시는 편해 좋다.

최근 들어 기억력 퇴보인지. 예전 같지 않게 길눈이 어두워졌다. 운전석에 앉으면 머릿속으로 길이 환하게 떠올라, 단숨에 내달리든 민첩함이 흐려졌다. 이러다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것 같은 두려움이 들곤 한다. 운전만큼은 자신 있고 더욱 길눈이 밝은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내 자존심이기도 했다. 어느 때부터 긴장감 없이 지극히 기계적인 동작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후, 어떻게 왔나. 아득함이 든다. 능숙하다는 자만심이 타성에 젖어 느슨해진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두려워 운전에서 손을 놓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곧 자율주행차가 예사롭게 도로를 누비는 시대가 곧 올 것이다. 내게도 그런 시절을 즐길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나이와 무관하게 운전면허증이 필요 없을 수 있다. 새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즐길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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