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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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아침 일찍 동네를 걷노라면 큰길 보행로를 따라가며 비질하는 노인과 마주치곤 한다. 초록 유니폼을 입은 것으로 보아 노인 일자리 창출의 일환인 것 같다. 왜소한 체구에 청소 용구를 밀고 다니며 열심히 쓰레기를 쓸어 담는다.

문득 1960년대 초 시골의 초등학교 고학년생이었을 때가 떠오른다. 여름방학이면 정해진 일시와 장소에 모여 동네를 청소하는 조기회가 있었다. 으레 샛별이 미소 지었지만, 간혹 늦잠에서 깨는 날이면 대빗자루 집어 들고 허겁지겁 내달리면서도 아침 모임에 빠졌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회상해보니 그 시절 여름밤의 하늘은 청순하고 아름다웠다. 저녁이면 짚이 깔린 마당에 멍석을 펼치고 드러누워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려가며 학교에서 배운 삼태성과 북두칠성 등 몇 개의 별자리를 찾노라면 심심찮게 별똥별이 꼬리를 늘리며 사라지기도 했다. 반딧불이도 호박잎 사이로 반짝이며 눈길을 당겼고, 모기가 팔다리를 물어대도 손바닥으로 후려치며 성가신 시간을 넘겼다. 어쩌다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 이슬에 젖는 경우엔 나른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나이 들어 실없이 우주의 크기를 상상해볼 때가 있다. 저 멀리멀리 나아가면 끝이 있을까, 없을까 헤아리다 이내 포기하고 만다.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일 것 같아서다. 얼마 전 인터넷에 실린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지구로부터 46억 광년 떨어져 있는 ‘SMACS 0723′ 은하단 사진을 보며, 상상력도 따라갈 수 없는 광활함에 할 말을 잃었다. 지구가 하나의 먼지라면 나는 티끌 축에도 못 끼는 존재라니.

이래서 자연은 신의 언어란 말이 생기는가 보다. 마당 구석엔 배롱나무 가지마다 꽃으로 활활 타고 있다. 당연하다 싶은데, 한쪽에선 철모르는 국화가 보름 전쯤부터 피기 시작했다. 쪼끄만 얼굴이 볼품없다. 그래도 코를 가까이하면 노란 향이 나온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을 아느냐고 묻는 것 같다. 달걀을 살짝 깨뜨려 탁자에 세웠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지. 이때 콜럼버스가 한 방 날렸으니, 누군가를 따라 하는 일은 쉬우나 처음 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고. 저 국화도 가을에 피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이지만, 무더위에 피웠노라고 선구자적 자부심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봄에 꽃을 피워 메주콩보다 좀 더 크게 열매들을 키운 돌배나무 분재도 다시 하얀 꽃을 피웠다. 이모작을 할 심산은 아닐 테고, 기후의 변화에 헷갈린다는 몸부림일 것만 같다. 아름다운 사계를 잃고 아열대로 변해버려도 괜찮겠냐고 정색하고 묻는 듯하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잡초는 눈에 띄게 자라며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주어진 환경을 즐기는 것 같다. 닭의장풀을 뽑아 며칠 돌덩이 위에 올려놓아도 푸른빛을 거두지 않는다. 한 번뿐인 생명이기에 견딜 수 있는 한 견디는 거라고, 그것뿐이라고 내게 말하나 보다.

내 마음의 정박지는 어디일까. 안전한 포구라도 물결은 일게 마련, 희로애락의 조각배에 몸을 실어도 침몰하지 않으면 된다. 절망이 평범한 날을 그립게 하고 고통은 재탄생의 씨앗이 된다는 믿음으로 하루를 넘는다. 영원히 살아가야 할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감사한다.

보는 것은 선택의 행위라기에, 다르게 보면 다른 사람이 된다기에 새롭게 맞을 내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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