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검증 당한 네 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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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아버지1

아버지는 그 시절 조천중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태 이후 아버지는 무기징역으로 마포형무소에 갇혔다. 이런 사실을 알 길 없는 할머니(아버지의 어머니)는 아버지 찾아 어머니를 서울로 보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에 살게됐다. 서울에서 아버지는 우리(가족)들과 따로 살다가 한국전쟁 이후 고향 제주에 왔고 조천읍 함덕리에서 시계 수리하며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시계 수리 외에 세상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누구와도 교분이 없었다. 아버지 이력을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경찰이 가끔 아버지를 찾아왔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몰랐지만 왜 경찰이 찾아오는지 묻지 못했다.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원망스러웠고 지금까지도 분노만 남았다. 아버지는 평생 병약했고 무기력했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를 죽도록 고생시킨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정말이지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2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애월면사무소 서기였다. 언제인지 모르나 사태에 산으로 갔다. 산으로 갔으니 입산자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는 한림면 어업조합 창고에 갇혔다. 어머니는 그해 칠월칠석날 군인들에게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총살되었다. 입산자가 있는 마을은 군경에 의한 희생이 뒤따랐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 대림마을은 피해가 전혀 없었지만 아버지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정뜨르 비행장에서 총살당했다. 졸지에 나(7세)와 누이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고아로 남았다.

#아버지3

아버지는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제주로 왔다. 지금의 오현중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개교 이후 역사를 가르쳤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당시 제주농업학교 막사로 끌려갔고 결국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었고 그후 소식이 없자 집안에서는 사망한 것으로 판단해서 아버지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1961년 경 한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일본 동경에서 온 아버지편지였다. 그 후 아버지는 동경에서 거주하다 1995년 6월 사망했다.

#아버지4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갔다. 동경대학에서 수학했는데 아마도 의학을 공부한 것으로 안다. 해방되자 공부도 다 마치지 못한 채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4·3사태에 산으로 갔다. 북촌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 날 총소리를 듣고 몰려나온 동네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넘겨져 대구형무소를 거쳐 마산형무소 수감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1954년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오른팔을 쓰지 못했다. 4·3 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아 장애자로 살아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제주의 착한 해녀였다. 거제도 집에 경찰이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는 딸에게 말했다. “다른 집 아버지처럼 능력이 없어 너희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랬던 아버지는 2013년, 8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지난 7월 12일 군법회의 피해자 이보연 외 67명의 유족이 청구한 재심 변론기일에서 사상검증 당한 4명의 아버지 이야기이다. 당시 조천중학원 선생이었고, 애월면 서기였고, 오현중학원 선생이었고, 북촌 주민이었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지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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