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후를 놓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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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영원할 것 같던 불볕더위도 물러서는 낌새다. 이른 아침 동네를 걸을 때면 열대야의 가장자리가 많이 야위었음을 느낀다. 불어오는 바람결이 제법 서늘하고 보송보송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더위가 수그러든다는 처서다.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데 성가신 곤충이지만 손대지 말고 열매나 알차게 영그는 절기였으면 좋겠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늙어가면 몸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너나없이 아프지 않게 살다 가기를 소망하며, 나름대로 건강관리를 위해 노력한다. 보편적인 방법이 걷기가 아닐까 한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아니면 나도 아침저녁으로 걷는다. 한 번에 길어 50분의 산책 겸 운동이다.

걷노라면 여러 사람과 마주친다. 건강을 위한 공통점을 지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결은 사뭇 다르다. 종아리 근육을 자랑하며 뛰어가는 젊은이는 정열로 삶을 불태울 것 같다. 천천히 보행 보조기를 밀며 나아가는 할머니는 편안한 얼굴이 그대로 마음일 테다. 큰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끊임없이 외며 지나는 키 큰 할아버지는 극락왕생을 꿈꿀 테고, ‘고요한 달밤에’만 반복하여 부르는 허리가 좀 굽은 노인은 인생무상을 읊조리는 성싶다. 나는 냉담자 된 지 오래지만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는다.

일전의 소동이 떠오른다. 생리작용으로 새벽 2시에 잠에서 깨었을 때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어지러워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선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앓는 소리가 건넛방에서 잠든 아내를 깨웠다. 아내는 힘들게 거실을 지나 화장실 앞까지 나를 옮겨놓았다. 나는 겨우 기어들어서 소피보고 다시 기어 나오자마자 새우등처럼 웅크린 채 산송장이 되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내는 숟가락으로 물을 떠서 입에 넣고 나서 메니에르 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토하지 않고 식도를 지나갔다. 반 시간쯤 끙끙거리노라니 어지러운 증상이 조금 잦아져 휘청이며 침대로 올라가 나머지 잠을 청했다.

돌이켜보니 징후를 놓쳐 제때 대처하지 못했지 않은가. 이틀 연달아 잠시 어지럼증이 일었는데 빈혈 수치가 떨어진 걸까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보름 전부터 왼쪽 귀에서 나지막하던 이명이 공장 엔지 돌아가듯 크게 들리는데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어쩌면 청력이 떨어진 데 대한 자포자기의 푸대접일 테다.

그래도 이번 소동은 지난해의 난리와 비교되어 행운의 여신께 감사한다. 작년 6월 마당의 한 그루 하귤나무에 올라 열매를 딸 때였다. 얼마 후 가볍게 어지러웠지만, 곧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저녁이 되자 한순간 천지개벽하듯 머리가 고속으로 빙글빙글 돌며 쓸개즙까지 토하라고 닦달했다. 119 구급대원들의 도움으로 제주대병원에 들러 자리가 없자 한라병원으로 이송되어 진료받을 때까지 한 시간 반쯤의 시간은 내가 겪은 고통의 극치였다. 몇 차례 수술대에 올랐던 건 새 발의 피였다.

의사는 어지럼증 난청 이명 이충만감 등을 일으키는 메니에르병은 달팽이관과 전정기관의 내부에 담긴 내림프액의 양이 증가할 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금·커피·술·담배를 멀리하라고 조언한다. 몸 상태가 좀 좋아졌다고 한 달 전부터 하루 두 잔 마시던 커피를 당장 끊어야겠다. 소리가 떠나는 귀도 다독여야겠다.

개미굴이 둑을 무너뜨린다는데, 작은 징후에도 미리 대처하며 모두 건강한 나날을 이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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