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던 천제연 근처를 덮친 집단학살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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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4·3의 아픔 서린 중문
집단희생의 상처 간직한 중문면
작은 마을들은 흔적조차 사라져
참혹한 학살극 일어난 중문성당
‘4·3 기념성당’ 지정해 넋 기려
제주4·3 당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중문지역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제연 공원에 세워진 중문면(中文面) 희생자 위령비와 표지석.
제주4·3 당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중문지역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제연 공원에 세워진 중문면(中文面) 희생자 위령비와 표지석.

▲천제연 공원에 세운 ‘제주4·3 중문면 희생자 위령비’

오래전 소와 돼지 등을 도축했던 곳인 천제연 주차장 일대는 4·3 당시에는 수많은 주민이 집단학살을 당한 곳이다. 인근의 여러 마을에서 붙잡혀온 40여 명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무장대와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살려고 도피했다는 죄목 등으로 붙잡혀 와 희생되었다. 천제연이 품어내는 아름다운 경관 뒤에 숨어있는 4·3의 짙은 아픔으로 방문객의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곳이 이곳이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문지역 역시 밤에는 무장대 습격으로 낮에는 군경 특히 서북청년단에 의해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중문지역 희생자들을 기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2008년 봄 천제연 입구에 ‘제주4·3 中文面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국제적인 관광지임을 고려하여 4개국 언어로 쓰인 표지석이 세워졌다. 위령비 뒷면에는 희생자 786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18세기에 나온 제주삼현도와 제주목(지승) 등에는 이곳에 있던 중문원이 院舍(원사)로, 1872년 발간된 대정군 지도에는 仲文院(중문원)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천제연이 천지연(天地淵)으로 표기되어 있다.

4·3 기념 십자가.
4·3 기념 십자가.

▲4·3의 짙은 아픔이 서려 있는 신사 터 중문천주교회

20여 호가 살고 있던 중문리의 위쪽 마을 주민들은 고지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소개되면서 그들이 살던 상문동(上文里:윗중문)은 현재 흔적조차 없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1899년 발간된 제주지도(제주군읍지)와 대정군지도 등에 천제연 주변 마을로 中文里, 東中文里, 上文里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중문동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자그마한 여러 마을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중문면의 중심마을인 중문리에 있었던 일본신사 터에는 광복 후 중문천주교회가 들어섰다. 천제연 근처에 위치한 중문성당은 4·3 당시 주민 집단학살 터 중 가장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던 곳이다. 특히 1948년 12월 17일 제2연대와의 교체를 앞둔 제9연대는 ‘마지막 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주민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이날 3살 난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20여 명이 총살당해야 했다. 지금의 성당 건물 뒤편에 위치한 주차장 인근에서 중문리 주민 34명, 색달리 17명, 강정리 6명, 상천리 5명 등 10여 마을 출신 71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2018년 10월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중문성당을 ‘4·3 기념성당’으로 지정하며 ‘4·3 기념 십자가’를 세웠다. 성당 입구에는 제주 전역에 있는 4·3 관련 주요 유적지와 발생 과정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설치하여 방문객들에게 안내하고 있다.

대정군 지도.
대정군 지도.

▲4·3으로 사라진 큰 마을 ‘무등이왓’

무등이왓은 중문면과 이웃한 안덕면의 중산간 마을의 이름으로, 4·3으로 사라진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이기도 하다. 4·3 당시 100호가 넘었던 무등이왓은 동광리의 중심마을이었다. 7소장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말총과, 마을 주변에 많이 자라는 대나무를 사용하여 탕건·망건·양태·차롱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생산지였다. 이제는 4·3으로 폐허가 된 마을 도처의 옛터, 시신이 없는 헛묘, 피신처였던 ‘큰넓궤’ 동굴 등이, 이곳 선인들이 당한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특히 1948년 12월 12일과 13일에 있었던 ‘잠복학살’은 토벌대의 비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만행으로 회자되고 있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온 주민들에게 대나무 밭에 숨어있던 토벌대가 저승사자처럼 다가왔다. 갑자기 나타나 주민들을 에워싼 토벌대는, 한 곳에 모여 앉힌 주민들 주위에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더니 그대로 불을 질렀다.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주민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죽어갔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노약자가 대부분이었다.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잔인한 학살에 몸서리 칠세도 없이 언젠가는 자신들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숨을 수밖에 없었다. 50여 일 동안 피신해 있던 큰넓궤가 알려지자, 무등이왓 주민들은 같이 숨어 지내던 이웃마을 사람들과 함께 겨울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으나…. 그들이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올라온 토벌대는,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토벌대는 큰넓궤에 모여들었던 120여 주민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임시 수용했다가, 모두를 정방폭포 위에서 또 집단학살에 나섰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았던 나머지 사람들도 무등이왓을 떠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잠복학살 터 주변에 있는 팽나무.
잠복학살터 주변에 있는 팽나무.

▲무등이왓의 비극을 지켜본 팽나무

300여 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무등이왓 주민들은 화전을 일군 농지에서 메밀과 콩 등을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또한 교육열이 높아 개량서당인 사숙(私塾)과 2년제 간이학교도 운영하고 있었다. 무등이왓에 세워졌던 동광간이학교는 감산리에 이어 화순리에 있던 안덕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지역 유일의 교육기관이어서, 창천·서광·상천 등 안덕면은 물론 중문면 여러 마을에서 다니기도 했었다. 무등이왓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데서, 또는 등급이 없는 무등(無等)의 세상을 꿈꾸는 선각자들이 사는 고장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다. 평화로가 지나는 동광 육거리 동쪽 인근에 위치한 무등이왓에 들어서면, 호젓한 마을길 따라가는 전원적인 마을 여정이 펼쳐지고 있음에 마음이 평온해져 오기도, 정겨운 옛 마을길과 당시의 집터 주변에 들어선 대나무들이 무언의 슬픔을 전하고 있음에 또한, 가슴 한편이 울컥해 오기도 한다. 잠복학살터 동산으로 오르면 이내 나른하듯 생기 잃고 서 있는 팽나무와 마주한다. 300년은 족히 넘는 팽나무만이 홀로 남아 70년 넘게 자신을 옥죄고 휘감는 송악과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4·3 이후 팽나무에 기생하기 시작한 송악은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그날의 참상을 지켜본 팽나무를 옥죄고 있었다. 증거의 나무인 팽나무가 신음하는 처연한 현장을 살펴본 사)질토래비에서는 이 어울리지 않은 동거를 해체하고자, 송악의 뿌리와 줄기를 갈라놓았다. 그동안 신음소리조차 못 내던 팽나무는 이제 겨우 푸른 기운을 찾아가고 있다. 생기를 찾아가는 오래된 팽나무를 향해 그리고 허무하게 삶을 잃은 이들의 안식을 위해 다시 두 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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