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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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두 번째 수필집을 내고자 봄부터 글 속에 묻혀 살았다. 갓 뽑아낸 새 글이 아닌, 지난 과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됐다. 선별 작업은 고민이 깊었다. 수십 편의 작품 중에 몇 편이나 글다운 글을 건질 수 있을지 난감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다. 지나간 것,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으나 앞으로의 삶에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다독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십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이라면 후덕한 그늘을 내리는 나무처럼 둥치도 굵어야 하고, 잎도 무성해야 한다. 나이만 먹었을 뿐, 빈약한 나무는 가지만 거침없이 뻗었을 뿐이었다. 글에 혼신을 기울여 매달리다 겨우 가까워졌나 싶으면 앵돌아서는, 소침해지는 내 자화상과 마주 앉곤 했다.

수정 작업은 끝도 없었다. 글자들이 서로 끼워달라고 아우성치듯 달려들었다. 다른 어휘로 바꾸면 문맥이 좀 살아날까. 이렇게 시작된 작업은 돌아서면 혼란스러운 결과로 돌아왔다. 자리에 누우면 활자들이 벽을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꼬물거렸다. 주제와 영 딴판인 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다시 돌려세우는 작업의 연속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무성한 글자의 숲에서 헤맸다.

무엇이든 만족이란 없다. 더구나 글은. 갈림길에서 선택이란 항상 두려움이다. 매번 망설이며 고민하다 결말에 이르곤 하는 삶의 일부처럼. 글을 쓰는 사유의 공간은 나의 소우주이자,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독자들에게 던지고자 한 진실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늦게 내가 어떤 글을 써왔나 어렴풋이 보인다. 더러 성취감을 얻고 실망하면서 늘그막 삶까지 이어주고 있으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랴.

그중에 기쁨은 있었다. 많은 작품 중에서 몇 편의 글은 그런대로 감성을 적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이런 순간을 위하여 쓰고, 욕망이 꿈틀거리는지 모른다. 한 편의 소중함, 작품성을 논하기 전에 가슴에 품어 내 마지막 길에 동행하고 싶은 분신 같은 존재였다. 내 삶의 고백서이자 혼자만의 애착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식에게 향하는 조건 없는 사랑처럼 가슴이 벅찼다.

내 삶을 풍요롭게 꾸며 준 것은 글이다. 노트북과 마주할 때는 내가 사는 의미를 찾는 시간이다. 일상이 답답해 두려움이 들 때, 도피처 같은 글 속으로 들어가 묻히곤 했다. 난 별스럽게 과거에 집착하는 편이다. 훌훌 털어내도 될 텐데 쉽지 않다. 살아온 과정을 책처럼 묶어 매듭을 짓고 새로운 페이지를 여는 삶이 된다면, 지난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게 부모라면, 내 인생에 큰 획을 그은 사회관계에 힘이 된 일은 문학과의 만남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었고, 색다른 타 장르와의 만남으로 생각하는 시야가 트였다. 다양하게 감성이 풍부한 멀리 가까이 문학인과의 교류는, 풍요로운 글 밭이 되는 거름이 되곤 한다. 타 작가의 작품을 읽고 영감이 떠올라 거침없이 한 편을 완성하고 난 후, 그 성취감을 무엇에 비유할까.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다. 묶였던 시간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어깨가 가볍다. 그동안 혹사당한 손과 어깨를 도닥이며 걷는다. 곧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문턱이 다가온다. 풀 먹인 모시같이 까슬까슬한 글자의 숲에서 여전히 나를 응시하며 글을 쓸 것이다. 결실의 계절에 옥동자 한 편 탄생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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