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역사와 이어지는 탐라국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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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탐라왕자묘(下)
남평문씨 역사서 곳곳에서 등장
고양부 삼성 이외 가장 빨리 입도
중앙문물 받아들인 결정적 계기
문창우 탐라왕자에 봉작되기도
여러 정황으로 보아 왕자묘 주인 
신보ㆍ충걸ㆍ충세 父子로 추정돼

 

남평문씨 입도조 및 탐라왕자 추모공원 내 추모탑. 제주에서는 고양부 삼성 이외에 남평문씨가 가장 빠른 시기에 입도했다고 회자 된다.
남평문씨 입도조 및 탐라왕자 추모공원 내 추모탑. 제주에서는 고양부 삼성 이외에 남평문씨가 가장 빠른 시기에 입도했다고 회자 된다.

여러 역사서에 등장하는 탐라왕자의 실체

인마(人馬)를 교체하고 지나는 길에 고둔과원(羔屯果園)에 들렸다. 탐라국 때 왕자가 살았던 곳이다. 감귤 등의 과일이 과원에 가득하고 뒤에는 생수가 나오는 자그마한 샘이 있다.”

이 글은 이익태 제주목사가 전도를 순력하며 1696년 적은 지영록(知瀛錄)’이란 역사서(1997년 제주문화원 번역)에 실려 있다.

현존하는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로 알려진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
현존하는 제주도 최초의 인문지리지로 알려진 ‘이익태 지영록(李益泰 知瀛錄)’.

비슷한 시기인 1702년 이형상 목사가 편찬한 탐라순력도의 41화폭 중 하나인 고원방고(羔園訪古)’에도, 왕자구지(王子舊地)와 함께 고둔과원이 등장한다.

고둔과원은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영곡 고득종의 별장 터라 전해지는 곳으로 현 서귀포시 용흥동 부근의 염돈과원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고둔과원은 하원동 탐라왕자 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고둔과원의 주인 고득종의 매부는 마지막 탐라왕자인 문충세의 아들이자 우도지관을 지낸 문방귀이고 고득종과 함께 제주의 전제(田制) 개혁을 세종에게 건의한 이는 문충세의 동생인 문충덕이다.

이렇듯 제주의 역사서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남평문씨는 한두기 등 여러 마을을 설촌한 시조로 문도령과 자청비에서 보듯 신화 속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한다.

제주인물대사전(김찬흡 편저·2016) 등에는 1267년 문행노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제주부사 최탁과 함께 민란을 평정한 탐라왕자 양호가, 원나라에 가서 비단 등을 선물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1270년 이전에는 양씨가문에서 탐라왕자 직을 세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267년과 127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 등의 영향으로, 탐라부사로 있던 문창우가 양호에 이어 탐라왕자에 봉작된다.

이후 탐라왕자 직은 문씨가문에서 5대에 걸쳐 6(창우·공제·승서·신보·충걸·충세)1270년부터 1402년까지 133년 동안 세습하였음을 여러 역사서는 전한다.

1194년 제주에 온 남평문씨 입도조 대제학 문착

제주에서는 삼성 이외에 남평문씨가 가장 빠른 시기에 입도했다고 회자 된다.

제주선현지(1988) 등에는 1194년 제주에 온 남평문씨 입도조 문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려조정은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대사마대원수(大司馬大元帥)를 역임하고 대제학으로 봉직중인 문착을 문교(文敎)가 빈약한 탐라에 특파한다.

문작()으로도 기록된 문착의 제주입도는 고··부 삼성이 주도해 오던 탐라의 문화와 교육을 새롭게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중앙문물을 받아들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나아가 고려 속방(屬邦)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는 점에서 문착의 입도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이러한 기록은 남평문씨사적기를 비롯한 조선의 오현으로 알려진 김굉필(金宏弼·1454~1504)이 남긴 한훤당집(寒喧堂集)’ 등에도 전해진다.

상주국 평장사에 추증되고 가야군에 봉해진 문착은, 1170년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을 평정한 충숙공 문극겸(중서시량 평장사)의 종손이고 원나라로부터 목화씨를 가져온 충선공 문익점의 선조이다.

입도조 문착과 탐라고씨 사이에 태어난 입도2세 문양부는, 용호대장군을 거쳐 병마대원사와 대사마대장군에 이어 금자광록대부 평장사를 지냈다.

문착의 호는 산남을 연상케 하는 남제(南濟)이고 남제공의 후손들로 이뤄진 4파의 장손 화성이파는 옛 남제주에 속하는 신레리와 법환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남평문씨 남제공파 종문회에서 발간하는 耽羅王子는 감란구민(戡亂救民)으로 탐라부사였던 문창우는 탐라왕자에 봉작됐다고 전한다.

남평문씨 첫 탐라왕자인 문창우의 아버지 문진은 원나라가 탐라에 총관부를 설치할 때 지총관직을 맡기도 했다.

왕자묘 석물 진본 문인석. 문인석 진본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있다.
왕자묘 석물 진본 문인석. 문인석 진본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있다.

하원동 탐라왕자 묘역 주인공들을 찾아

1765년 편찬 추정되는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는 ‘()산의 조금 서쪽에 월라악이, 그 위에 왕자묘가 있다(山之稍西月羅岳 上有王子墓).’라고 했다.

이곳은 왕자골이라 불리는 상예13546번지 일대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월라악 인근 마을인 화순리에는 오래전부터 양왕자터(333번지 일대)’로 불리어온 지역도 있다. 강정동에도 대궐터’(4263번지 일대)로 불리어온 지역이 있다.

이에 더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영주지와 탐라지 등에는 삼신인의 거주 지역인 1·2·3도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반면, 1450년 영곡 고득종이 지은 탐라고씨족보 서세문에는 삼성인의 거주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을나 사는 곳은 한라산 북쪽인 1도리로 지금의 제주땅이고, 양을나 사는 곳은 제2도로 한라산 남쪽 땅인 산방리로 지금의 대정땅이고 부을나 사는 곳은 제3도로 한라산 왼쪽 땅의 남쪽인 토산리로 지금의 정의땅이다.

앞에서 보았듯 산남지역과 관계 깊은 양을나, 양왕자 터, 탐라왕자 양호등을 뒤로 하고복원된 하원동 탐라왕자묘로 다시 돌아가자.

이원조 제주목사가 1842년 편찬한탐라지초본에는 왕자묘 3기가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는 궁산(弓山) 양쪽 하천 사이에 있다.”라고 쓰여 있다.

발굴조사단은 하원동 탐라왕자 3기 묘역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13~15세기)되고, 매장자는 원나라 백백태자라는 주장이 있으나 검토결과 증거가 미약하다.”라고 결론 내렸다.

원나라 왕족인 백백태자와 달달친왕 등이 제주에 와서 거처했던 곳은 지금의 삼양동 원당봉 북쪽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보아도 그들 무덤은 이곳과는 무관하다 할 것이다.

또 제주도청 등 왕자묘 안내의 글 중에는 묘역은 남평문씨 왕자 2대에 걸친 고분으로, 테두리 돌담이 서로 중복되어 있는 1호와 2호의 무덤 주인은 서로 강한 연관관계가 있다.”라고 하였다.

특히 발굴조사단이 제안한 축조시기인 여말선초는 탐라왕자가 재임했던 마지막 시기를 뜻한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하원동 탐라왕자묘의 주인공은 마지막 탐라왕자들인 문신보와, 문충걸과 문충세 부자로 높게 추정된다. 문충세는 탐라왕자 문신보의 4자 중 둘째로 문충걸의 아우이다.

이들 3인의 관계는 부자지간이며, 또한 왕자구지와 고둔과원의 주인 고득종과도 인척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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