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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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김춘수 시인은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몸짓→꽃’의 이행은 심대한 변화다.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 어떤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 관계란 연인일 수도 있고, 구경적 정신의 경계, 이르고자 하는 형이상적 도달점, 예술가에겐 닿으려는 가장 아름다운 미학의 경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애게 잊혀지지 않을 눈짓이 되고 싶다’고 했다. ‘눈짓’은 이상의 실현을 함축하는 상징적 함의다.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사람뿐이랴. 동식물은 물론 무정물도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잡풀·잡목이라 싸잡아 부르는 한낱 푸나무에게도 이름이 있는 것이 이상할 이유가 없다. 자기를 불러달라는 당연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서만 부르고 불리기를 바란다면 이런 이기적 발상은 없다. 세상 어디 그런 맹탕에다 밴댕이 속이 있을 것인가. 미물도 낯 찡그리며 웃을 일이다.

하늘, 바다, 산, 나무, 꽃, 새, 바람, 구름 같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존재감을 갖고 있는 것들이야 그렇다 할 뿐이지만, 조그만 벌레며 들판에 무더기로 돋아나는 작은 풀 하나에까지 이름이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귀뚤귀뚤 운다고 귀뚜리, 까맣다고 까마귀, 기럭기럭 기러기, 따옥따옥 따오기라 했으니 이름들은 얼마나 구성지고 유의미한 감성 덩어리인가. 무궁화가 나라꽃이라 공대하거나, 장미만 고혹해하면 그건 공평하지 않다. 잔치를 벌인다고 유채꽃을 보듬고, 냇가의 수양버들 춤사위만 하늘거린다며 눈독 들이면 속 보이는 법이다. 바닷가 찬바람에 몸 움츠려 피는 쑥부쟁이며, 밭 가에 번식을 위해 피었다 지는 무채색 망초의 꽃에도 눈을 보내야 한다. 망초, 얼마나 희망적인 이름인가.

아무 데나 나고 자란다고 닭의장풀로 불리는 달개비는 참 대우가 박한 것 같다. 꽃의 그 색의 속살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보석 사파이어, 영락없는 9월의 하늘을 품은 사파이어 빛이다. 보석은 희소가치지만, 달개비는 가난한 사람의 가슴에 품어 부티를 경험케 하는 따뜻한 위안의 꽃이다.

밥이 뜸 들었나 보려고 밥풀 둘을 입에 넣었다가 모진 시어머니에게 들켜 훔쳐먹었다고, 웃어른께 먼저 드릴 밥인데 버릇없다고 매를 때리자 그게 아니라고 사실대로 얘기하다 혀를 내민 채 죽고 말았다 한다. 이듬해 며느리 무덤가에 흰 밥풀 둘을 물고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는 슬픈 전설의 꽃, 며느리밥풀꽃에 이르러 눈이 먼 산으로 간다. 불러줘야 할 슬픈 이름이다.

나는 나와 연 닿는 사람의 이름을 즐겨 부른다. 부르기 좋은 이름이든 거북한 이름이든 부르노라면 정이 샘솟는 게 이름이다. 한데 불러줘야 하는데, 아직 불러주지 못한 이름이 있다. 동생같이 아끼는 수필가 양봉의 부인 이름이다. 엊그제 부부가 내가 겪고 있는 뇌질환에 좋다면서 구지뽕 조청 여러 그릇을 갖고 읍내에서 달려왔지 않은가. 산에 가 열매를 따고 더위도 무릅쓰고 가마솥에 다가앉아 고은 조청. 그들을 맞으며 체면도 잊고 울컥했다.

한데 아직 양 작가 부인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다. ‘재경이 엄마’라 부른다. 진즉부터 딸의 이름만 불러온 것. 남의 부인 이름을 대놓고 부르진 않으니, 다음 만나면 이름이라도 물어봐야겠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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