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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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춘희 / 수필가

양손으로 조심스레 찻잔을 감싼다. 조금 전까지 찻물을 담고 있었던 잔은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다. 혼자 차를 마실 때 자주 사용하는 이 찻잔은 매끈하지도 않고 균형 또한 맞지 않는 비대칭이다. 보통 잔보다 크고 조금은 투박하다. 가장자리는 몇 군데 작은 상처가 있지만 오랜 세월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여섯 살까지 나도 달항아리처럼 희고 둥글고 매끈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일곱 살 되던 해 동생을 업고 부엌 문지방을 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한순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달항아리는 깨져 버리고 다시는 본래의 이마를 가질 수 없었다.
저녁 무렵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쑥을 짓이겨 무명천으로 이마를 동여맨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넋을 놓고 절퍼덕 주저앉으셨다. 
“하필이면 계집애가 이마를 다쳐서….” 
할아버지가 내뱉은 말은 어머니의 새가슴을 더욱 파닥거리게 했다. 이마가 피범벅이 된 딸을 업고 이웃 마을에 있는 의원으로 내달리셨다. 뼈가 보일 만큼 움푹 팬 딸의 이마를 본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아렸을지, 내가 겪게 될 마음의 상처를 어린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은 알사탕의 달콤함과 따뜻한 어머니 등에 파묻혀 단잠에 빠졌다. 어머니는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초등학교 다닐 때 한 번도 머리를 묶어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예쁜 머리띠를 하고 이마를 드러내어 머리를 묶는 걸 보고 어머니를 조르곤 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너는 단발이 더 잘 어울린다.” 
언제나 내 청을 거절하지 않는 어머니였지만 머리만큼은 단발을 고집했다. 늘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다니게 했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으면 흉터를 볼 수 없지만 나와 마주할 때마다 내 이마를 보는 어머니 마음은 찢어졌으리라.
사춘기 이전까지 이마에 난 흉터에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미모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서면 확대경을 들이댄 것처럼 흉터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그때마다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그림자가 순간순간 나를 절망스럽게 했다. 내 등에 업혔던 동생에게 “이 모든 게 네 탓이야!”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동생은 정말 자기 탓처럼 소리죽여 울었다. 어머니는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내 이마의 흉터는 어머니와 동생에게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 앞머리를 걷어내고 연신 이마를 어루만지는 어머니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모녀는 신세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곧 환골탈태할 것 같은 희망에 비행기가 내는 프로펠러의 시끄러운 소리조차도 행진곡으로 들렸다.
어머니가 수소문하여 찾아낸 성형수술의 권위자라는 의사와 마주 앉았다. 내 이마를 본 의사는 수술 불가 판정을 내렸다. 수술하기에는 흉터가 너무 작다고 했다. 교통사고 같은 큰 사고로 난 상처를 봉합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작은 흉터까지는 성형술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새살이 돋아나고 흉터는 점점 작아진다고 말했다. 나보다 더 아쉬워하는 이는 어머니였다.
의사는 제주도에서 올라왔다는 우리 모녀를 번갈아 보며 내게 세상에서 가장 딸을 사랑하는 엄마를 가졌다고 말했다. 농사일로 그을린 어머니의 얼굴과 마디져 굵은 손을 보았음이 분명하다. 세월이 흘러 성형술이 더 발전하면 그때는 정성을 다해 수술해주겠다고 했다. 
스무 살에 만난 의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용기를 주는 말로 마음의 상처를 위로해주었다. 
금이 간 도자기나 깨진 그릇을 송진이나 옻 등의 접착제에 금가루나 은가루를 이용해 수선하여 사용하는 일이 있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깨진 그릇을 버리는 게 아니라 세월의 상처까지도 보듬는다. 인간도, 물건도 완전하게 살아갈 수만은 없다. 더구나 인간은 무수히 많은 시간과 관계 속에서 수없이 상처를 받는 존재다. 그 상처 속에서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며 성숙해 나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찻잔에 차를 따른다. 올해 수확한 햇차의 맑은 향이 온유함으로 가슴까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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