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벽(面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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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벽을 마주하고 수련하는 것을 면벽이라 한다. 다른 말로 좌선(坐禪)이다. 유래가 있다. 달마존자가 양 무제를 만나 문답하던 끝에 소견이 어긋나 양자강을 건너 위나라 승산 소림사에 숨어 있었다. 경론을 설하지 않고, 불상에 절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석벽을 향해 좌선해 9년을 지냈다 한다. ‘면벽 9년’, 그 뒤로 선승들이 선원에서 좌선하려면 반드시 벽을 향하게 된 소이다.

달마는 소림사 뒷산 동굴에서 수련 중, 누구와 말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오직 벽만을 바라보았다 한다. 밖으로 향하는 모든 둘레를 절벽처럼 굳게 차단함으로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를 통해 일체의 번뇌에 휩쓸리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지니기 위함이었다. 생명을 유지해야 하므로 3,4일에 한 번 시중을 드는 이가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음식을 넣어 주면 됐다. 나머지는 일절 끊은 단절이었다. 선(禪)의 실천을 내세운 달마는 결국 선종의 창시자가 된다.

동굴 속이라야 하고 반드시 앞에 벽을 마주하고 있어야 면벽이 아니다. 가톨릭 세계의 ‘봉쇄수도원’을 떠올린다. 벽으로 말하면 겹겹이고 단단하기로 하면 석벽보다 훨씬 더한 철벽이다. 우리는 〈위대한 침묵, 2005〉이란 영화, TV 다큐멘터리를 생생히 기억한다. 경북 상주에 있는 카투시오 봉쇄수도회의 카투시오봉쇄수도원.

바깥세상과 사귀거나 드나듦이 막힌 수도원, 그야말로 봉쇄된 좁디좁은 구역 안에서 봉쇄 규범을 지키며 모든 삶이 오직 내적 명상으로만 향해 있는 곳. 한평생 봉쇄 구역을 떠나지 않고 엄격한 침묵과 처절한 고독 속에 스스로 갇혀 선택된 삶을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기도로 가득 채워지는 곳이다. 기도가 전부인 그곳 11명 수도사들의 삶은 소박하고 위대했다.

수도사가 신은 구멍 난 양말이 클로즈업된 컷이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사람들이 물신주의에 빠져 부와 명예를 좇아 정신없이 내달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본받기 위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해 살아가는 수도사들의 적나라한 민낯 아닌가.

방영 후, 수도원으로 수백 켤레의 양말이 후원 물품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수도사들이 그마저 이웃 마을 주민들에게 보냈다는 뒷얘기를 남겼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작은 것이 큰 것을 이루고 키우는 법이 아닌가. 다양한 국적의 수도사들인데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나눔을 실천하는 마음은 하나임을 여실히 보여준 일화다.

우리는 책상 앞 벽에다 좌우명을 써 붙인다. 자신의 삶을 일관해 실천하리라는 신념이나 표방이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 속에서 구체화해 내기는 쉽지 않다. 잘못 밟았다 폭발하는 지뢰 같은 위험도 도사려 있을 것이고, 나아감을 가로막는 뜻밖의 장애며, 거대한 암초에 걸려 꼼짝 못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를 견디게 하고, 일어나 걷게 하고, 눈앞의 어둠을 몰아내게 하는 힘이 불끈 용솟음 칠 수가 있다. 뜻밖의 힘,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이 불가사의한 기운을 신앙인들은 기도에서 찾을 것이다. 기도는 기복(祈福)만 뜻하지 않는다. 자기를 향한, 자아실현을 간구하는 마음속의 소리 없는 외침이 아닌가.

선승이나 수도사가 벽을 마주해 수련하는 것만이 면벽이 아닐 것이다. 자기를 이루려는 것, 자신의 삶의 근원과 조우하려는 것, 그리하여 참되려는 가장 본래적인 욕구가 면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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