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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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숙, 재릉초등학교 교장·수필가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초등학교 시절, 즐겨 불렀던 동요이다. 이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면 마음이 왠지 서글퍼진다. 음률 때문일까? 일제강점기 시대의 서러운 한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다시 못 올 철없던 시절의 그리움 때문일까?

어렸을 적 서귀포 솜반천 근처 딋병디에 살았던 나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가녀린 풀잎으로 나뭇잎 배를 만들어 띄우며 놀았던 추억이 있다. 요즘같이 코팅이 잘 된 종이도 너무나 귀한 때였다. 억새 잎처럼 날씬하고 윤기 있는 길쭉한 잎의 양쪽 끝을 안쪽으로 살짝 접고 다시 접힌 부분을 세 등분으로 나눠 양쪽 끝 두 부분을 찢어 맞물려 끼우면 완성이 된다.

크기도 다양하니 저마다의 손재주 따라 만들어진 나뭇잎 배들이 둥둥 출발선에 떠있다. “시작신호와 함께 물길을 막은 고무신이 들려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뭇잎 배들은 서로 부딪히며 곡예 하듯 아슬아슬 흘러간다. 여울물 따라 흘러가다 바위를 만나 곤두박질칠까 봐 어린 가슴은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고무신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누구 배가 멀리 가는지 환호성을 질렀다. 엎어질 듯하면서도 용케 중심을 잡고 편안한 물길에 실려 두둥실 흘러갈 때는 내가 물살을 가르는 것처럼, 너무나 신이 났다.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배가 가라앉지 않고 잘 흘러가는 게 신기하고 마냥 좋았다.

내 나뭇잎 배는 가라앉지 않고, 먼 길을 잘 떠나갔을까? 붉은 노을빛이 솜반천에물 그림자로 잠기고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향했다. 눈앞에서 사라져 간 나뭇잎 배가 엄마 곁에 누워서도 내내 생각이 났다. 그날 밤 가을 뙤약볕에 익은 아이는 소로록 잠이 들고 가보지 못한 낯설고 신기한 세상 속으로 나뭇잎 배를 타고 팔랑팔랑 떠나가는 꿈을 꿨다.

그날처럼 가을볕이 따갑다. 학교에 조그만 사각 연못이 있다. 누가 조성한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 수중 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다. 요즘은 수련, 물봉숭아가 한창이다. 기억을 더듬어 대나무 잎으로 배를 만들어 본다. 작고 푸른 나뭇잎은 접히고 맞물려 잎 문양이 더 선명하고 앙증스럽다. 과연 이 작디작은 배가 물 위를 잘 떠 갈 수 있을까?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물 위에 살포시 놓는다. 물 위에 살살 바람결 따라 미끄러져 가는 나뭇잎 배, 그런데 수중 잎새 사이에 끼더니, 겹쳐진 잎의 틈새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 순식간의 일이다. 금방 가라앉겠구나, 실망하려던 찰라, 상상하지도 못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또르르 배어든 물이 이슬처럼 동그랗게 맺히더니 이상하게도 더는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작은 물방울이 새어드는 물을 온 힘으로 막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이 배가 영영 가라앉지 않기를 어린아이처럼 기도했다. 그래야만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왠지 행운이 일어날 것 같은 바람이 얼른 두 손을 모으게 했다. 내 염원에 화답하듯 작은 배는 균형을 잘 잡고 영롱하게 떠 있다. 그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애잔했다. 이 작은 배가 꼭 내 모습이다. 안간힘을 쓰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은 눈물 한 방울로 맺혀 나뭇잎 배에 실려있다.

흔들리지 않고 눈물 없이 가는 생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눈앞의 작은 나뭇잎 배는 눈물 한 방울 싣고 많은 잎새 사이에 고요히 떠 있다. 앞으로의 내 생도 이렇게 균형을 잘 잡으며 의연히 세상을 떠가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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