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숲으로 오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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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역시 계절의 순환은 질서이고 절도다. 들볶던 폭염에 늦더위로 위세를 부리더니, 부사리같이 덤벼드는 가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숲이 우거진 아파트다. 산이 아니라도 이곳 숲을 거닐면 철이 오가는 낌새를 너끈히 알아차린다. 염량(炎涼)이 때를 알아 오가는 추이를 불어오는 바람결과 등 뒤로 내리는 햇볕으로도 느낀다. 사람은 시절 변화에 민감한 촉수를 지녔다

웃통 위에 덧옷 하나 걸치고 시월의 아파트 숲으로 들어선다. 스산하다. 숲 새로 건듯 소슬바람이 지나는 기척인가. 그 바람결에 오랜만에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는 들숨 날숨, 숲의 숨결인가. 후우잇. 잦아들 듯 한동안 이어진다. 바람이 숲을 술렁이게 하는 건 이제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 숲의 숨결은 그에 답하는 서로 간의 교신일까. 가을을 알리는 바람은 능동이고 그에 답해 숲이 크게 숨 쉬는 건 피동, 하긴 연년이 이맘때면 늘 그랬다. 그러면서 계절이 끊임없이 흘러온다.

그러고 보니, 숲이 그새 달라졌다. 내려앉은 햇살에 비친 저 모호한 듯 누리끼리 한 빛깔의 점진적 진행. 누가 아직 덜 풀린 저 빛깔을 흩어놓은 것일까. 노릇노릇 색이 짙어지면서 시나브로 가을이 깊어 갈 것이다.

성급한 벚나무는 낙엽이 한창이다. 몇 번 비를 맞아 누렇게 물들더니 잎이 지고 있다. 흩날리다 내려 쌓이고 나뒹굴고, 아파트 뜰이 뒤숭숭하다. 옆의 단풍나무는 이제껏 여여해 초록인데 노란 낙엽이라니. 청황의 대비가 미묘한 뉘앙스를 자아낸다. 일찍 물들어 떨어지는 잎과 느긋이 한때를 누리려는 것과의 엄연한 다름. 어쩔 수 없는 것, 타고난 나무의 태생이 저러한가.

가을비를 맞는 숲이 을씨년스럽다. 비 뒤, 기온이 내린다더니 기상예보가 맞았다. 바람이 가세했다. 숲으로 난 오솔길 따라 몰아치는 소스리바람이 손 시리게 차다. 요즘 가을은 느닷없이 와선 겨울로 내달아 짧다.

잔뜩 긴장했는지 나무들 숨소리가 가쁘다. 나무에겐 껴입을 옷이 없다. 뿌리 박은 곳에 선 채 평생을 나야 하는 운명의 나무들이다. 그럼에도 주어진 분수를 따를 뿐, 한마디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 순명(順命)이다. 사람에 비할 바 아닌 강단이다. 저 참을성, 자신을 성찰하는 풍도, 사람이 넘보지 못하게 철학적이 아닌가.

벚나무 밑 벤치에 앉으려는데, 청소 아줌마가 장비를 들고 다가선다. 여기저기 쌓인 벚나무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일하는 이에게 군말로 들릴라 가만 보고 있다,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어 나직이 얘기를 건넨다.

“아주머니, 낙엽을 꼭 쓸어야 하나요? 이제부터 낙엽의 시절인데, 좀 둬도 될 걸 ….” “관리사무소에서 쓸어야 한대요. 낙엽도 말끔히 쓸라고요.” “….”

옛시조에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요.’라 했다. 꽃 대신해 ‘낙엽인들 잎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요.’ 하면 어떤가. 하지만 나 혼자 부질없는 생각일 뿐. 청소 아줌마는 낙엽을 쓸어 비닐봉지에 담아 넣기에 바쁘다. 뒤로 끊이지 않고 낙엽이 내리고 있다.

가까이 산이 다가앉은 아파트다. 이미 산을 내린 가을이거늘 마을 어귀에서 머뭇거리겠는가. 기웃거리던 가을이 며칠 후면 아파트 숲을 완전히 점거할 테고, 나무들도 바싹 더 긴장할 것이다. 그리고 낮은 곳에 엎딘 풀들도 숨죽여가며, 눈앞으로 다가올 겨울나기 채비를 서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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