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시나무를 키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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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명숙 / 수필가

“할머니, 이 나무 이름이 뭔지 아세요?” 서늘맞이를 위해 여덟 살 손녀와 대정읍 구억리, 제주 곶자왈 도립공원에 들어섰다. 초목이 우거진 숲길에 발을 내딛자 풀벌레 소리가 고막을 흔들어 깨운다. 한 여름인데도 피부에 닿는 솔바람 한 줄기가 일상의 무료함을 밀어낸다.

초입에 들어서서 사색에 잠기려는 순간, 앞서가던 손녀가 이름 모를 나무앞에 멈춰서더니 나를 보고 손짓한다. 다가가 살펴보니, 잎은 활엽수처럼 넓고 잎사귀는 길쭉한 타원형에 끝은 피뢰침처럼 뾰족했으며, 오른 쪽 나뭇가지는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나있고 왼쪽에 가지들은 수평으로 아름드리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 키의 세배가 훨씬 넘어 보인다.

손녀는 빛기둥사이로 더듬거리며 나무이름 알아맞히기 퀴즈 문구가 적혀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패를 만지작거린다. 덮개가 있는 나무패를 열어보니 나무의 형태와 이름 맞추기를 초성 ‘ㅈㄱㅅ나무’ 라고 적혀있으나 쉽사리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나를 보더니, 손녀는 “종가시나무예요” 자신 있는 목소리다. 이미 이곳을 다녀갔었나 보다.

그곳에는 종가시나무가 여럿 관찰되었다. 제주도의 서부지역은 강수량이 동부지역보다 절반정도로 빗물이나 이슬이 머무는 시간이 짧다. 한경·안덕 곶자왈 지대의 경우는 종가시나무가 울창하여 숲의 주종을 이루고, 구좌·조천 곶자왈 지대는 빗물이 오래 머물게 되어 구실잣밤나무가 숲을 이룬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종가시나무를 보니 지금까지 나를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주신 분들이 떠오른다.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은 물론 부모님이다. 동식물에게도 자생력이 있다는 데 나는 지금 어떠한 신념으로 우주의 의지를 열어가고 있는가. 작은 용기는 어디서부터 싹이 돋았을까. 지금도 뇌리에는 둘째 숙부님과 작은 숙모님의 말씀이 늦잎처럼 남아있다.

나는 잘하는 재능도 없었으나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임하신 숙부님은 그러한 나를 만날 때마다 “요망지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찾는다면 학생 시절 체육시간의 오래달리기 같은 지구력이다.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으셨던 부모님 밑에서도 나의 자존감을 굳건하게 지켜주신 것은 숙부모님 관심이었지 싶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아마도 집안 경조사에 애쓰시는 큰 며느리인 어머니의 노고를 나에게 덕담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였으리라.

좋은 말씀도 자주 듣다보면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스며드는 것일까. 늡늡하신 숙모님은 나의 치열이 바른 것을 빗대어, 이후에 대문 큰 집에 시집 갈 거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하기야 대문 큰 집이 아닌 대문이 아예 없는 시골집에 시집갔으니, 정직하게 자영업을 하는 남편 덕분에 오늘에 내가 있지 싶다.

종가시나무가 척박한 돌 틈에 뿌리를 내려 서로 공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어린 나무가 자라 성목이 되기까지에는 주변에 나무들이 지지대 역할을 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손녀 지혜의 눈망울을 쳐다보며 저 종가시나무처럼 끈질기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역시 그 나무처럼 환경이 윤택하지 않아도 가까운 분들이 힘을 북돋아준 영향이 컸지 싶다. 튼튼한 줄기와 깊은 뿌리, 그게 이 숲길을 걷는 손녀와 나에게 전해주는 종가시나무의 교훈이리라.

나무의 굵은 가지들은 양손바닥을 떠받치듯 삼발이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나무 앞에서 어른들이 나에게 행한 것처럼 나는 손녀에게 어떠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을까. 이제 숙부님은 이곳에 안계시지만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숲을 한 바퀴 돌고 나왔다. 이때 손녀가 귀갓길이 못내 아쉬운 듯 다음에도 숲길에 오자고 한다. “그래, 오늘처럼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 종가시나무도 잘 크고 있는지 보러 올까?”. 손녀가 나의 품에 안기며 까르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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