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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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엄마, 죽었어!” 손뼉을 치며 뒤로 벌러덩 넘어가도록 배를 잡고 웃었다. 잠깐 아픈 허리를 펼 여유가 생겼다. 어머니는 약이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블라우스 자락을 펄럭여 부채질하신다. 한참 웃다 통쾌하게 내지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민망한 생각에 어서 커피값을 내라고 손을 내밀었다.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차곡차곡 접힌 채 두둑하다.

어머니는 윷놀이의 달인이다. 종일 윷판을 벌려도 싫증을 내지 않고, 자식이나 손자와 놀기 좋아하신다. 원래 무슨 일이나 재미 붙여 빠져들기 시작하면, 쉽게 포기하지 않고 즐긴다. 그것도 덤덤하게 놀면 재미없어해, 치열하게 겨뤄 승부를 봐야 만족해한다. 동생들은 적당히 흥을 섞어 감정의 끈을 조절하며 은근슬쩍 떼도 쓴다. 그렇다고 눈속임은 어림없다.

어머니가 달력 뒷장에 손수 그려 만든 말판에는 지옥과 임신 자리가 있다. 지옥에선 말이 죽고 임신 자리는, 말을 하나 더 얹어가는 행운의 자리다. 임신으로 세 개를 엎고 잘 가던 어머니의 말이, 옴짝달싹 못 하는 지옥에 다다라 모두 죽어버렸다. 다 이긴 게임에 패배가 확실해진 어머니와 달리, 가망 없던 승리가 눈앞인 내가 엄마 말이 죽었다고 쾌재를 불렀다.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에 내려왔다. 전염병으로 오랫동안 벼르던 일이다. 서귀포 전망 좋은 곳에 숙소를 정했다. 우리 부부도 가방을 꾸려 여행 떠나듯 집을 나섰다. 그동안 갇혀 살아온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던 참이다. 딸과 사위가 어울린 어머니의 여행 일정은, 즐겁고 따뜻하게 무르익어 갔다.

혼자 집에 계시는 게 답답해 자식들이 가면 윷부터 내놓는다. 끼니도 대충 때우고 빨리 놀자고 재촉까지 하신다. 이렇게 시작된 윷놀이에 흠뻑 빠져, 제주에 내려오는 가방 속에 당연히 윷이 빠질 수 없다. 저녁을 먹고 시작한 놀이는 시간이 갈수록 달아올랐다. 수년 만에 윷을 잡은 내 감각은 녹슬었다. 집중력이 떨어져 말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말판을 꿰차고 있다 후다닥 대신 놔주었다. 동생들도 혀를 차는 어머니의 순발력은 정확하고 수를 읽는 감이 뛰어났다. 지난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는 윷놀이 같은 달인은 아니었을지.

선잠에 부스스한 얼굴로 새벽 산책길에 나섰다. 딸에게 깊숙이 간직한 아버지와의 아련한 추억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어머니. 기억이 흐려질 만도 한데 그리움은 변함없이 애틋하고 절절하다. 가슴이 먹먹해 마주 보는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가까이에 없는 자식을 대신해 지팡이에 의지하며, 귀가 어두워 세상을 눈으로 읽어 소소한 일상을 엮어 나가신다. 듣는 게 불편해 윷놀이로 답답한 일상을 해소하신다는 걸 알았을 때 목이 메었다. 그게 어머니만의 대화방식이었다. 오래 살아 너희들에게 짐이 된다며 민망해하시지만, 삶에 대한 의지는 여전히 열정적이다.

언제 이런 기회를 또 가질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 될지 모른다. 붉은 단풍잎 속에서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노란 국화꽃 허연 머리카락 사이에 꽂은 어머니. 꽃처럼 아름다웠을 어머니의 젊은 날이 보일 듯하다. 소녀처럼 어서 사진 찍자고 채근하신다. 둥글넓적 호빵 닮은 얼굴들이 렌즈 속에서 실눈으로 웃고 있다. 행복한 순간이 카메라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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