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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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갑자기 식탁에 은수저가 놓였다. 아내가 친구에게서 결혼 선물로 받은 것인데,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중학교 1학년 때 전학하면서 헤어진 친구 이름이 숟가락에 뚜렷이 새겨 있다.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름, ‘규운’. 한국전쟁 직후 가족이 월남해 제주까지 내려오면서 맺게 된 인연이다. 어릴 때지만, 당시 부모가 대학을 나온 지식인들이었다고 아내가 기억하고 있다. 피란민으로 남의 집에 살면서도 친구네 가족은 뭔가 달랐다 한다. 외양만으로도 지적인 언행이며 풍모였을 테다.

아내와는 절친이었는데, 다른 애들과는 불편했던 모양이다. 토박이가 아닌데다 더욱이 북한에서 피란 온 아이라 말까지 달라 섞이기 힘들었을 것이고, 더욱이 이곳 분위기에 익숙지 못해 나무람을 받았을 법하다. 아내는 그 애를 가까이 편들어 방패막이가 돼 주었던 것 같다.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우정이 유달랐던 것만은 분명하다.

포항으로 떠났다 한다. 결혼한다고 알렸겠지만, 값비싼 은수저를 소포로 보내왔다. 그것도 부부 몫으로 두 벌. 신혼 초 우리 부부가 같이 쓰다 식탁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손에서 멀어져 챙기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은수저는 까맣게 녹이 잘 슬어 손이 많이 가므로 깊숙이 박혀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이사 오며 잊고 있다 아내의 눈에 띄어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한숨께나 쉬었을 것이다.

아내의 친구 규운 씨는 30년쯤 전, 우리 집에 와 대면한 적이 있다. 좋은 곳을 물색할 수 있으면 제주에 살고 싶다 한 걸음이었다. 암 치료 중인데 공기 좋은 제주에 살면서 힐링하고 싶다고 했다. 제주의 동쪽에 마음이 가 있는 것 같아 구좌와 성산 지역까지 몇 군데를 함께 돌아다녔다. 오가는 길에 먼 학생 시절 아내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웃는 모습이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제주 귀촌 계획의 단초는 아내와의 옛 우정에서 나왔을 법도해 성사됐으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이틀을 우리 집에서 지내며 마냥 권했다.

하지만 돌아가 알리겠다던 규운 씨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여러 날 고민하는 중에 병이 악화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며 아내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어렵지 않으나, 때론 이어지기 쉽지 않은 게 사람의 연이다.

은수저는 자체로 살균작용을 한다고 한다. 독이나 중금속이 닿으면 검게 변한다. 독살 시도를 막기 위해 옛날 수라상에 올랐던 귀중품이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속담은 부잣집 태생이란 비유다. 여염에서도 은숟가락, 은젓가락은 부잣집을 상징하는 고급스러운 사치품으로 톡톡히 대우를 받는다.

우리 부부가 결혼하던 60년대, 궁핍하던 시절에 아내에게 보내준 은수저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비싼 거라 값을 치려는 게 아니다. 먼 데서 아잇적 친구에게 보내준 그 마음….

오랜만에 은수저를 보는 감회가 유별하다. 말쑥한데 여느 것보다 아주 작고 짧고 날렵해 앙증맞다. 젓가락은 눈에 띄게 가늘어 손에 넣어 만지작거리게 한다. 어쩌다 제주에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던 아내의 친구 규운 씨, 더 이어지지 못한 두 사람의 인연이 못내 아쉽다.

돌아간 사람은 이곳에 없지만, 우리는 그분이 선물한 귀중한 은수저로 삼시 세끼를 먹으며 살아간다. 아내는 은수저에 이름이 새겨진 그 친구를 잊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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