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쏟아지는 소리…마음을 다독이는 가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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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송악도서관(上)
송악도서관이 마련한 작은연주회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라
‘숨과 쉼을 품은 가을 소리’ 주제로 악기 연주·노래·시 낭송
올해 다섯 번째 바람난장이 지난달 29일 서귀포시 대정읍 소재 송악도서관에서 펼쳐졌다. 야외는 바람 소리, 새 소리, 툭 떨어지는 낙엽 소리, 가을밤 별이 쏟아지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 가을빛이 완연했다. 고은 作.
올해 다섯 번째 바람난장이 지난달 29일 서귀포시 대정읍 소재 송악도서관에서 펼쳐졌다. 야외는 바람 소리, 새 소리, 툭 떨어지는 낙엽 소리, 가을밤 별이 쏟아지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 가을빛이 완연했다. 고은 作.

만추(晩秋). 초록이 물러간 자리마다 가을 색이 들어앉았습니다. 부드러운 가을볕 아래 오도카니 앉아 수시로 가슴을 열어두고 싶은 때입니다.

가을의 절정은 도심을 떠나 외진 곳에서 더 눈부십니다. 은빛으로 한 몸이 된 억새와 오름, 한라산을 물들인 단풍들, 눈 닿는 곳 어디든 이 섬은 가을 색이 완연합니다.

풍경이 마음으로 스며들고 나면 이번엔 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툭 떨어지는 낙엽 소리. 좀 더 과장을 보태면 가을밤 별이 쏟아지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소리는 이렇게 늘 배후로서만 존재하지만 때론 풍경의 잔상을 더 깊이 각인시켜주기도 합니다. 흔들리는 억새는 오름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그리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바람 소리로 존재를 표현하는 억새의 바스락거림, 그것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할 감정이고 풍경이니까요.

연극인 강상훈이 정군칠 시인의 ‘가문동 편지’를 낭송하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고 있다.
연극인 강상훈이 정군칠 시인의 ‘가문동 편지’를 낭송하며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고 있다.

시월의 마지막 주말, 바람난장도 아주 특별한 소리를 전하러 대정으로 떠났습니다. 송악도서관이 마련한 ‘2022년 도서관 한마당’ 프로그램 중 하나인 작은 음악회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다양한 악기 연주와 노래, 시 낭송 등 풍성한 소리를 들려줄 이번 공연의 제목은 ‘숨과 쉼을 품은 가을 소리’. 첫 무대는 전병규 님의 소금 연주(반주 현희순 님)가 열었습니다. 깊고 그윽한 소금 연주가 넉넉한 가을바람에 실려 퍼져나가고 어느새 청중은 소란을 잠재우고 귀를 기울입니다.

가을은 숨겨둔 편지 한 장 꺼내 보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연극인 강상훈 님이 정군칠 시인의 ‘가문동 편지’를 들고 나왔습니다. 바람이 유난한 모슬포에서 청춘을 보낸 시인의 작품에선 바람과 파도의 소리가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 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정군칠 시인의 ‘가문동 편지’ 전문

연주가 전병규가 깊고 그윽한 소금 연주로 바람난장 첫 무대를 열고 있다.
연주가 전병규가 깊고 그윽한 소금 연주로 바람난장 첫 무대를 열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아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 진 아픔이 왜 없었겠냐’며 아프고 불편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집니다. ‘너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서 있는 주변을 돌아보게 합니다. ‘짐승의 비명’처럼 생살이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겨우 빠져나온 바다는 ‘철벅철벅’ 가슴을 칩니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귀를 열어둔다’는 것,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는 것뿐. 이토록 깊은 회한이 또 있을까요.

백색소음이라고 하죠. 파도 소리, 비 오는 소리처럼 일정한 규칙을 두고 반복되는 자연의 소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연주가 이관홍이 감미로운 플루트 연주로 청중을 집중시키고 있다.
연주가 이관홍이 감미로운 플루트 연주로 청중을 집중시키고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백색소음의 조건이라면 플루트 선율도 다르지 않습니다. 적당한 빠르기와 호흡으로 연주하는 이관홍님의 감미로운 은빛 선율이 금세 청중을 집중시키니 말입니다. 음악은 인간이 내는 가장 아름다운 소음일지 모릅니다.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내게 필요한 착한 소리에 취해보는 건 어떨까요. 시 낭송도 좋고 음악도 좋고 자연의 소리도 좋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듣고 끝내지는 마세요. 듣는다는 건 보는 것만큼 중독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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