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의 시대를 겪은 모슬포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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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근·현대 역사문화 녹아있는 대정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대거 유입
분산 수용 위해 포로수용소 들어서
위문공연 등 위한 군예대 활동도
고병오·박용후 향토 사학 이끌어
중공군 포로수용소 폐허지. 1980년대 개간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일부 벽체만 남아있다.
중공군 포로수용소 폐허지. 1980년대 개간 등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일부 벽체만 남아있다.

피난민의 입도와 (국내외) 포로수용소

19507월 중순부터 1만여 명의 피난민 제1진이 제주시, 성산포, 한림항으로 들어와서 공공시설과 민가 등에 수용되었고, 1951년 말에는 15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환자들이 대거 발생하자 정부에서는 구호병원 4개소와 진료소 30개소를 설치했다. 민간인과 군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하모리 북쪽 노롱곶에 병원을 세웠는데, 이곳이 98병원이다. 모슬포에는 특히 많은 피난민이 몰려와서 민가에는 빈방이 없을 정도였으며 피난민을 등에 업어 면의원에 당선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무렵 모슬포는 군인과 피난민이 거리를 메우는 등 인구가 급증해 큰 도시를 방불케 했다.

한국전쟁 중 정부는 포화상태에 이른 거제수용소 포로들을 분산·수용하고자 모슬포에 포로수용소를 세웠다. 모슬포 포로수용소는 19516월 중공군 포로 5600명이 LST 상륙함에 태워져 모슬포항으로 입항하면서 설치됐다. 이후 이송된 숫자까지 합하면 14000여 명의 중공군이 모슬포에 머물기도 했다.

그들은 모슬포 비행장에 격리 수용돼 비행장 입구에서 사계리 방면으로 가는 길을 확장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2101(소련혁명기념일)에는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42명이 죽고 120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954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중공군 포로 가운데 반공포로들은 그들의 의사에 따라 자유중국인 대만으로 보내졌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물이 있던 곳의 정식 명칭은 제20수용소였다. 이곳은 북한군이 아닌 중공군 포로들로만 수용됐던 냉전시대의 산물이자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여러 곳에 배치됐던 포로수용소 건물은 현재 사실상 방치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모리 경작지 지경에 있던 수용소는 길이 20m 남짓, 높이 2m 정도의 석축벽만 남아 있다. 1980년대 밭 개간 등으로 대부분 없어졌고 남아 있는 건물은 벽체뿐이다.

19515월 육군 군종단이 창설돼 군종신부들이 제주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이곳은 1901년에 발생한 신축민란인 이재수 난이 일어난 곳으로 천주교를 믿으면 죽는다는 공포심이 퍼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 포로수용소에 중국어에 능통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설리반 신부가 임명됐다.

설리반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할동을 하다 추방된 선교사였다. 설리반 신부가 1951년 종군신부로 부임한 후, 신자 포로들과 함께 주민들에게도 사목활동을 펼쳤다. 설리반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자 육군 공병대가 부지의 정지작업을 지원했고, 당시 송악산 근방에 수용되어 있던 중공군 반공포로들 중 일부를 성당 건물공사에 투입하기도 했다. 1954년 서귀포본당 소속 모슬포공소가 축성되니 1901년 신축교난으로 없어졌던 천주교회가 다시 대정지역에 들어서기도 했다.

군예대에서 삼다도 소식짓고 노래하다

1951년 말 대정읍 하모리 1046번지 목조건물 2층에서 육군 제1훈련소 소속으로 창단된 군예대(훈련병을 위한 위문공연과 군가 보급 등을 담당한 부대)는 육지에서 피난 온 저명한 예술가들로 편성됐다. 당시의 작사·작곡가와 가수로는 유호·박시춘·남인수·고복수·황금심·신카나리아·구봉서 등이 있었다. 우선 제1훈련소가 제정에 착수한 뒤 유호가 제1훈련소가를 지었고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군예대에서 전우가, 1훈련소 간부교육대가, 특히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황금심이 노래한 삼다도 소식등 노래가 1951년 말 모슬포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1952년 봄, 대정읍 인성리 사무소에서는 소사가 요령을 흔들고 다니며 오늘저녁 위문공연이 있으니, 주민께서는 각자 깔고 앉을 멍석이나 가마니를 가지고 이사무소로 나오세요하는 전갈이 있었고, 가설무대에서 가수 황금심이 노래 삼다도 소식을 불러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남인수, 문예봉, 황금심 등이 활동했던 역사를 간직한 2층짜리 일본식 건물인 군예대 건물은 대정읍 바닷가에 위치한 용천수 신영물에서 북서쪽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최근 철거됐다.

모슬포가 낳은 향토사학자 정재 고병오와 송계 박용후

제주의 역사문화 본 고장이라 할 수 있는 대정지역은 오래전부터 향토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됐다. 최근에도 역사문화 연구회를 조직해 향토사를 연구하고 공유하는 모임 활동이 타 지역의 모범이 될 만큼 적극적이고 활발하다. 그 중 모슬포가 낳은 정재 고병오 선생(사진)과 송계 박용후 선생에 대해 약술한다.

고병오 선생.
고병오 선생.

정재(正齋) 고병오 선생은 평생 일제와 군부독재에 일관되게 항거한 한학자이다. 대정읍 상모리(모실개)에서 태어난 고병오(高炳五· 1899~1972)는 어려서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1918년 전북 부안군 계화도로 건너가 간재(艮齋) 전우의 문하생이 됐다. 간재 전우는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던 전라도의 유명한 한학자다.

1926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융희황제인 순종이 붕어하자 정재는 크게 통곡하며 서울을 향해 북방요배(北方遙拜)를 올렸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하였던 정재는 옥중음(獄中吟)이란 한시에서 나라 안이 온통 감옥이라 하여 그 결구에 한번 죽기란 어렵지 않으나 정의 편에 서서 살기란 그렇게도 어렵구나(一死非難就義難)”하고 읊었다. 그의 저서로는 정재시집, 정재잡록, 경하수필, 정재사초, 대정현지 등이 있다. 특히 대정현지는 정재와 동향인 송계 박용후가 번역하고 재편하여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라 해 공저로 간행했다.

1972년 유신시대를 맞아 정재는 운명을 예견하고는 상투를 튼 채 의관을 갖추어 절명절필시를 남기고 이승을 떴다. 한 평생 한복만을 입고 상투를 튼 최후의 제주선비로서 오직 공맹지도(孔孟之道)로 일관하면서 이단지학(異端之學)을 거부했다. 1998년 문하생들에 의해 고 정재 고병오 선생 학덕비(學德碑)’가 대정읍 사무소 앞에 세워졌다.

삼의사비 근처에는 이 고장 출신 향토사학자인 송계 박용후 선생 송덕비도 세워져 있다. 대정읍 하모리(모실개)에서 태어나 중등교장을 지낸 송계 박용후(1909-1993)1921년 대정공립보통학교를 3년 수업하고 광선의숙에서 2년을 더 다녔는데, 이 학교에서 교사 강규언의 민족주의 정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강규언은 중문 태생으로 1919년 항일운동을 한 교사로, 1920년대 초 모슬포 광선의숙 숙장으로 설립에 동참했다. 광선(光鮮)의숙은 조선을 광복한다는 의미로,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과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윤식명 목사에 의해 모슬포에 설립된 학교였으며, 19938월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용후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고 귀향해 광선의숙 교사를 역임하고, 독학으로 교사 검정교시에 합격하여 초등교육에 종사했다.

 

박용후 선생의 공덕비.
박용후 선생의 공덕비.

한학에 뜻을 둬 한학자 고병오의 영향을 받았으며,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를 고병오와 공저로 간행했다. 현 대정초등학교 동쪽 모퉁이에 세운 대한민족 해방기념비의 비문은 그가 대정교 교사로 재임 당시 한학자 고병오의 도움을 얻어 지은 글이다.

해방 후 중등교육에 투신, 제주외솔회 부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향토사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다. 저서로는 대정군지, 남제주군지, 제주도지, 대정읍 약사, 국역 남사록, 최남단 모슬포, 제주도 옛 땅이름 연구, 제주도 방언연구(자료편), 제주도 방언연구(고찰편) 등이 있다. 방언 연구는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됐다.

또 임제의 남명소승, 김상헌의 남사록, 현덕문의 탁라국서 등을 국역했다. 196010여 년간 수집한 13000자의 방언을 문법적으로 체계화한 제주방언집을 출간, 이런 노력으로 1976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19985월 제주도 유맥 600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그를 기리어 보성초등학교 입구에 송계 박용후 선생 송덕비를 세웠다.

 

지금까지 대정현 근·현대 역사문화 깃든 길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다음 호에서는 섬 속의 섬인 우도에 대해 돌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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