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애국정신 강조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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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렬, 여성 독립운동가
일제치하 항일 운동 전개

장공우, 일제 침략에 항거
청년동맹 항일 활동 펼쳐

장병윤, 제주 출신 항일운동
농민위원회 조직·확대 주도

장봉수, 조선 말기 교육자
삼양동·월정리 지명 명명

장봉익, 격변기 훈장·의생
의술로 지역사회 발전 공헌
제주시 삼양동 소재 원당봉 모습. 조선 말기 교육자 장봉수는 원당봉 아래 삼양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봉을 자호로 삼았다. 장봉수는 박운경과 협의해 삼양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 (사진=제주관광공사 비짓제주 제공)
제주시 삼양동 소재 원당봉 모습. 조선 말기 교육자 장봉수는 원당봉 아래 삼양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봉을 자호로 삼았다. 장봉수는 박운경과 협의해 삼양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 (사진=제주관광공사 비짓제주 제공)

장경렬 張璟烈1914(일제강점기)~2001,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의생(醫生) 장한규(張漢奎)의 딸로서 제주면 삼도리 제주-성안인화(仁和)의원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애월포이다.

1933년 부산여상을 졸업, 한때 제주청년동맹 여성 맹원으로서 김병랑(金炳娘), 김정자(金貞子), 강순자(康順子) 등과 함께 지목돼 일본 경찰에 구금당했다. 1936년 항일운동 동지 이익우(李益雨)와 결혼했다. 부산 초량동에 살던 장경렬은 이웃에 살던 하순철과 접선했다. 부산 영주동의 김동윤(金東潤), 경남 합천군 덕곡면 장리(壯里) 출신으로 부산에 거주하는 정인수(鄭寅秀) 등은 1933310일 하순철 댁에서 몰래 모여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비밀결사 산업별노동조합 부산건설협의회를 조직했다.

 

장공우 張貢禹1911(일제강점기)~?, 제주 청년동맹의 항일 활동.

본관 인동, 장한규(張漢奎)의 아들, 항일여성, 장경렬(張璟烈)의 오빠, 삼도동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1931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항일 활동으로 19311216일 대구복심법에서 문종순은 징역 1, 장종식·이태윤 징역 8월을, 이에 앞서 광주지법 제주지청은 1심에서 형이 확정된 장공우는 징역 9월을, 홍순일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장공우는 1952112일 자유당 제주도 당부가 결성돼 위원장에 박우상(朴雨相)이 선출, 그는 상임 집행위원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 학교를 37일 졸업하고 동 9일 교장 관사로 돌입해 건물과 집기 등을 파손시킨 항일 학생운동이 일어나 당시 그도 가담한 관계로 체포됐다.

장병윤 張炳允1914(일제강점기)~1983, 협재리 독서회 활동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의 항일활동.

본관 인동, 장문환(張文煥)의 차남, 한림읍 협재리 섭지에서 태어났으며 1950년 석호(碩鎬)로 개명, 그는 19347월 일경에 체포됐다. 1937412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4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동지 15명과 함께 기소돼 1928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大阪등지에서 노동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관한 서적을 탐독했다. 1930년 귀국해 동향의 윤한진(尹漢珍)의 지도로 동지 장병윤(張炳允), 강공흡(姜公洽), 고창순(高昌淳), 장정호(張禎鎬), 김이규(金二奎), 김승옥(金昇玉) 등과 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동년 3월 하순 홍경옥, 장병윤(張炳允)은 윤한진의 집에서 함께 그는 193155일 일어난 한림공립보통학교 맹휴(盟休)의 배후로 지목 받아 이익우(李益雨), 최복렬(崔福烈), 윤한진(尹漢珍) 4명과 함께 구속당했다.

또 동지 장용진(張溶珍)이 검거됐다. 193259일 장용진이 석방되자 환영회를 개최하면서 조직을 재건하게 됐다. 19331월경 제주도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한림면의 농민위원회는 김경봉(金京奉), 양병시(梁秉時)가 주도했다. 협재리 섭지의 운동을 이끌던 홍경옥은 19342월 김경봉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체 결성을 결심했다. 19342월 하순 장병윤, 강공흡 등과 동지규합에 힘썼다.

협재리의 운동가들은 19347월 비밀결사를 조직해 홍경옥을 책임자로 하고 농민부에 홍경옥, 재정부에 장용진, 가도부에 장병윤, 소년부에 강공흡을 각각 담당했다.

그는 이 무렵 김경봉(金京奉)의 지도로 제주도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준비위의 운동이 활발했다. 이를 주도한 이는 김두경(金斗璟)과 전협계(全協系), 강팽학(康彭鶴) 등이었다.

김두경은 19331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를 정해 부병훈夫秉勳을 책임자로 지명하였다. 한림 혁명적 농조준비조직인 농민위원회가 193210월 중순에 김경봉, 양병시, 장한호(張漢鎬) 등에 의해 조직됐. 이 농민위를 19347월 적색(赤色) 노농연구회로 개조, 이어 신좌면 농업조합준비위원회등으로 조직 확대돼 이 일로 62명이 구속되었다.

 

장봉수(張鳳秀) 유적단비(遺蹟壇碑).
장봉수(張鳳秀) 유적단비(遺蹟壇碑).

장봉수 張鳳秀1846(숙종12)~1914(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자는 경빈(景賓), 호는 원봉(元峰). 본관은 인동, 제주시 삼양동 -에서 태어났다.

성장한 뒤 호남 장성의 한학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생, 그는 의병장 기우만(奇宇萬)의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에 공감, 애국사상을 강조했다. 후일 문하생 중에서 항일인사가 배출된 것도 그의 영향을 받은 데서였다.

타계한 지 20여 년이 지나 193610원봉선생유적단비를 문하생 일동의 이름으로 건립했다. 원당봉 아래 삼양리에서 태어났기에 자호로 삼았다.

원봉은 박운경(朴雲景)과 협의해 삼양(三陽)이란 마을 이름을 지었다. 즉 서흘포(鋤屹浦) ‘-와 감을포(甘乙浦) ‘가물-및 매촌(梅村) 등 세 동네를 합한 자와 천기운도(天機運度)의 동력 중추인 중양(重陽)’()자를 합쳐서 이명里名을 명명했다.

이후 다년간에 걸쳐 구좌읍 월정리 무주-에서 서당을 개설해 훈학에 몰두하고, 마을 이름을 무주(武州)라고 하던 것을 월정(月汀) ‘무주애로 바꾼 것도 그가 주장한 것이다. 달이 뜨는 아름답고 맑은 해변의 촌락이다라는 뜻이다.

장봉익 張鳳翼1878(고종15)~1956, 서당 훈장. 의생(醫生). 호는 춘헌(春軒). 본관은 인동, 애월읍 애월리 하물-마을에서 태어났다.

1916년 의생 자격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향리인 애월 하물-마을에서 춘헌의원(春軒醫院)을 개설해 인술을 펼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도 공헌했다.

본도에도 1911년 일제에 의해 자혜(慈惠)의원이 개설돼 서구의 현대의학이 도입됐다.

향민들은 춘헌의 공적을 기리어 공적비를 애월리 -서상동 석축대(石築台)에 세웠다.

젊은 시절 서당 훈장으로 후진을 가르쳤다. 개화된 신문명을 빨리 수용해 현대의학을 독학으로 38세 때에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주민의 수준과 현대의학의 몰이해로 어려움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치병 수단은 오직 한방(韓方)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때라서, 1920년 여름 경신년(庚申年) 호열자(콜레라)라는 유행병으로 본도의 사망자가 4134명이나 발생하던 시절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1946년 여름 또 병술년(丙戌年) 호열자가 유행해 35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럴 때마다 춘헌은 귀중한 생명체의 소생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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