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의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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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순 / 수필가

유월의 마지막 날 아침, 주차장 옆에 핀 빨간 수국이 눈길을 끈다. 보통의 수국과 달리 꽃나무와 잎사귀가 작고 요망진 모습이다. 흰색 계통의 큰 꽃들이라 관심을 주지 않던 수국이 이런 모습도 있었다니. 사무실로 와 인터넷을 뒤졌다. 수국은 처음에는 흰색을 띠고 있다가 흙의 산도에 따라 산성이면 파란색, 알칼리성이면 붉은색이 된다고 한다. 새로 출근하는 곳에서 만난 수국. 마치 나를 환영하는 것만 같다.

긴 코로나와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양성이란다. 아무 생각 없이 무기력한 날들을 지내고 기운을 차리고 보니 며칠이 훌쩍 지나버렸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긴 했으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책장을 뒤적여 평소 마음에 두던 수필집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성취에 연연하며 좌고우면하는 대신 바늘로 우물을 파듯 미련스레 천착해야만 한다. 좌절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묵묵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라는 문장 앞에 시선을 멈췄다.

오래전부터 수필 강의를 듣기도 하고, 졸작이지만 끼적이며 나만의 성취감을 누리곤 했다. 그것도 잠깐, 오래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일상이 바뀌고, 여러 일자리를 헤매게 되었다. 여유 없는 날들을 핑계하며 점점 글쓰기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보니 열정의 불씨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 뭐든 시작은 하고도 제자리 되기가 일쑤였다. 이리저리 망설이다 뒤로 물러서 버리는 내게 좌고우면하지 말란다는 말은 바늘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최고가 아니라 나만의 것을 위해 느리게 갈지라도 미련스레 천착하라니, 가슴이 묵직해졌다.

소심한 마음을 뒤로하고 자신 있게 다시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느리면 어떤가. 깊은 통찰과 사유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하나씩 이뤄가면 될 것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수국이 나를 불러 세운 것처럼 누군가는 동감하며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은 사범대를 졸업하고도 임용고사를 도전하지 않았다. 나름의 뜻이 있었지만 난 처음엔 걱정이 되었다. 다른 길을 찾고 있다며 대안학교, 학원 등을 전전하며 남과 다른 길을 걷던 아들이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포기했나 싶었는데, 때가 왔다며 신학 공부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쉬운 길이 아님을 알기에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 결심이 굳건하니 앞길을 막아설 수 없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연단과 인내, 물질적인 어려움까지도 감내해야 할 길. 그 길을 걷겠다는 아들이 염려되기도 했지만, 내심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나도 마음 어딘가에 그 길을 기대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닮지 않아 무슨 일이든 야무지게 해내는 아들에게 조용히 응원을 보탤 뿐이다.

“신이 너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마음에 새겼으니 비바람이 불어도 당당히 걸어가라. 바늘로 우물을 파듯 천착하는 꾸준함을 잃지 말아라. 너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일이라는 확신도 놓지 말고. 당연히 그렇게 해낼 것이라 믿는다.”

아들이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도중에 돌아서고 싶은 날도 분명히 있으리라. 그렇더라도 좌고우면하지 말라고 전하고 싶다. 어느 곳에서나 제 역할을 묵묵히 해내며 멋진 꽃을 피워내리라 믿는다.

빨간 수국이 환하게 웃고 있다. 새로 만난 아이들의 미소 같다. 수국의 응원을 받으며 오늘도 나와 인연을 맺은 어린 친구들을 기다린다. 함박웃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들과 함께 내가 머무는 이곳에서 나도 수국꽃처럼 꽃을 피워보리라. 어느 흙에서나 움츠리지 않고 꽃을 피우는 수국. 빨간색이든 파란색이든 색깔만 다를 뿐, 수국은 수국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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