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빚은 섬…곳곳의 절경에 눈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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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설문대할망 설화 살아숨쉬는 곳
제주 본섬을 쏙 빼 닮은 ‘축소판’
무인도였다가 1844년부터 거주
해안 방어 군사 요충지로 기능도
1997년부터 동굴음악회 열려와
‘섬속의 섬’으로 불리는 제주시 우도면 전경.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섬속의 섬’으로 불리는 제주시 우도면 전경.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설문대할망의 화룡점정인 우도

신화는 소원이 실린 바람이다. 바람이 극진하면 이루어지듯 제주선인들은 신화에 바람을 실었다. 18000신들을 창조하고 모셔와 바람을 실어 소원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

제주 도처는 설문대할망이 심혈을 기울인 설치예술품의 전시장 같다. 신들의 고향인 제주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고, 우도에는 쇠머리오름과 알오름이 이웃하고 있다.

132m 높이의 쇠머리오름인 우두봉 정상 한쪽에 있는 우도등대 너머로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가 그림처럼 곱다. 등대 한 편에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도와 우도를 포근히 감싸는 조형물도 설치돼 있다. 설문대할망이 한라산과 오름, 그리고 제주 본섬을 창조하고 나서 우도를 만들었다고 전한 데서 착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도를 창조한 설문대할망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라산과 오름을 만드는 일에 지친 설문대는 그제야 휴식의 소중함을 알았다. 설문대가 휴식을 즐긴 곳은 가장 나중에 만든 성산도(城山島)이다. 하지만 성산도는 곧 본도와 연결돼 반도가 될 것이었다.

그래, 섬을 닮은 자그마한 섬 하나를 더 만들자, 식산봉과 마주하는 또 하나의 오름을 만들자.’ 산이 높으면 물도 깊어야 하는 법, 성산도와 우두봉 사이 바다에 V 형태의 깊은 바다협곡을 만든 설문대가 바다의 협곡동산을 솟아오르게 하니 우두봉이 생겼다. 제주섬과 성산도처럼 소섬과 비양도도 만들고, 고운 바다에 어울리는 홍조단괴 널려 있는 백사장도 만들었다.

하지만 식산봉은 거친 물결을 막기에 야트막해 다시 웅장한 바위산을 만드니 성산일출봉이 솟아올랐다. 한라산과 오름들에 이어 만들어진 우도는 설문대할망의 설치예술 화룡점정 그 자체라 전한다.

설문대할망이 만든 섬 우도에는 1904143호에 701(291)명이 살고 있었다. 1914년 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1946년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1963년 연평출장소 설치, 19864월 드디어 우도면으로 승격되고, 꾸준히 인구가 증가해 1996년에는 651호에 3,007명이 살기도 했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면으로 알려진 우도에는 202211월 현재 902세대, 1671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문헌 속의 우도

오래전 소섬 우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다가 1844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무인도였던 소섬 우도에 관한 고문서 중 조선왕조신록과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우도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세종대왕 당시 제주도안무사인 한승순이 임금께 올린 장계에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정의현 동쪽 우도봉과 대정현 서쪽 죽도(고산 차귀도로 추정)는 자고로 왜선이 숨어 정박해서 가장 요해의 땅이 되옵는데, 우도의 인근에 있는 수산(성산읍 수산)과 죽도의 인근에 있는 서귀 방호소에는 모두 성곽이 없사온데, 만일 왜적이 밤을 타고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사와 응적하기에 어려우니, 형편을 요량하여 성을 쌓게 하시고 적변을 대응하게 하소서.” 하니 세종께서 그대로 하라 했다.

또 다른 고문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우도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조선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 등이 조선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시에 보강해 1530년 나온 책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서책의 제주목 산천조에 실린 우도에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도는 둘레가 100리인데 주 동쪽 정의 지경에 있다. 사람과 말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 섬의 서남쪽에 굴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들여놓을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5, 6척을 감출만 하다. 그 위에는 큰 돌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려놓아 있는 것 같다. 공기가 심히 차고 냉해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 말하길 신룡(神龍)이 사는 곳이라 한다. 7·8월 사이에는 고기잡이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심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가 뽑히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 위의 서남쪽기록은 동남쪽의 오기(誤記)로 보이며, 우도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가서 목격한 것이 아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실은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오현 충암 김정의 우도가(牛島歌)와 동굴음악회

바다 경치가 매우 희귀하고 빼어나 고래가 살았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고래굴은 고래콧구멍 굴’, ‘검멀레 동굴혹은 동안경굴로도 불린다.

이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길이가 긴 해식동굴로 200여 명이 들어설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이러한 천혜의 환경을 활용하여 1997년부터 이곳에서는 매년 동굴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우도 동굴의 매력에 빠져서 이곳을 노래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충암 김정이다.

그는 제주오현(충암 김정, 청음 송시열, 규암 송인수,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의 한 분으로, 중종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어 1520년에 제주도에 유배와서 1521년에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서거하셨다.

그는 12개월 동안 제주유생들을 교학하고, 그의 조카에게 보낸 제주풍토록은 당시 제주의 실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암은 제주목에 위리안치돼 우도에 올 수 없는 몸이었으나, 당시 적지 않은 이들로부터 우도에 관한 다양한 일화들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방생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우도 이야기를 듣고 시를 쓴 것이 충암 김정의 우도가이다. “조각배 노 저어 들어가니 몸과 마음이 쭈뼛하고 태평소 요란히 불어대니 늙은 용이 듣는구나.” 이 한시는 우도 바다동굴의 풍광을 격조 있게 노래한 시로 이 시 전문이 실린 시비가 검멀레해변이 바라보이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1992년 동굴소리연구회를 조직한 성악가 현행복님은 2006년 발간된 우도지(牛島誌)에 충암 김정의 우도가를 번역해 해설까지 실었다. 다음은 우도가에 대한 그의 평이다.

오백여 년 전에 김정이 남긴 우도가는 우도동굴의 신비로움을 환상적으로 노래한 한 편의 장대한 판타지이다. 고대 동양의 신비로운 신화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드는 시상이야말로 이 시만이 갖는 매력이자 특징이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신비로움은 퇴색되지 않은 채 동굴의 현묘한 이치를 늘 우리의 곁에 전하고 있다. 이 시의 배경인 우도는 제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비치는 제주의 부상(扶桑·해가 뜨는 동쪽에 있다는 상상의 나무)이요, 문화의 섬으로 부상(浮上)하는 곳이다. 그 서광을 받아 부디 우도여 동굴이여, 영원 하라!’

동굴음악회가 행해지는 장소인 동안경굴은 음악회를 열기에는 최적의 환상적인 장소다.

동안경굴 입구는 두 군데로, 하나는 바다로, 하나는 굴속으로 가는 입구이다. 입구를 찾아가는 길처럼 신비스러움이 일렁이는 곳이 바로 우도의 동안경굴이다. 우도를 방문했다면 바로 이곳을 구경했다는 말과 통할 정도로 이곳은 우도 방문의 1번지라 할 것이다.

바다로 트인 동안경굴에서 음악회 참석자들은 바다를 관조하는 한편 동굴 벽에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음을 듣는 행운을 갖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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