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비경의 깊은 울림을 문학으로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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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선조들 우도 아름다움 작품에 담아
오현 1인 충암 김정 선생 유배 중
전해 들은 이야기로 ‘우도가’ 지어
백호 임제 기행문 ‘남명소승’ 통해
우도동굴 답사기 등 감회를 남겨
우도봉에서 바라 본 우도 전경.
우도봉에서 바라 본 우도 전경.

충암 김정 선생의 우도가(牛島歌)

우도 동굴의 매력에 빠져 이곳을 노래한 제주오현(五賢)의 한 분인 충암 김정 선생은 1520년에 제주도에 유배 와서 1521년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서거했다. 선생께서는 우도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실제로 본 듯한 내용을 담아 우도가(牛島歌)’를 지으셨다.

다음은 선생께서 지으신 우도가의 원래 제목인 聞方生談牛島歌以寄興(문방생담우도가이기흥·방생이 우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노래로 흥을 부치다)’의 원문과 한글 표기와 해석이다.

우도 검멀래 해변 위에 세워진 충암 김정 선생의 ‘우도가’ 시비.
우도 검멀래 해변 위에 세워진 충암 김정 선생의 ‘우도가’ 시비.

瀛州東頭鼇抃傾(영주동두오변경) 영주산 동쪽 끝이 산을 짊어졌던 자라가 춤추면서 기울더니

千年閟影涵重溟(천년비영함중명) 천년 비궁의 모습이 깊은 바다에 잠겼어라

群仙上訴攝五精(군선상소섭오정) 뭇 신선들 상제께 호소하여 오정을 끌어들여

屭贔一夜轟雷霆(희비일야굉뇌정) 하룻밤 힘써 일을 내니 벼락 천둥소리 요란 했다네

雲開霧廓忽涌出(운개무곽홀용출) 구름 개고 안개 걷히자 홀연히 솟아나니

瑞山新畵飛王廷(서산신화비왕정) 상서로운 산 다시 그려내어 급히 조정에 보고되었네

溟濤崩洶噬山腹(명도붕흉서산복) 성난 파도 높이 솟구치며 산허리 잡아채고

洞天深雲扃(함하동천심운경) 툭 트인 산골짜기 깊게 구름 빗장 걸렸어라

稜層鏤壁錦纈殷(능층루벽금힐은) 깎아지른 절벽 온통 비단무늬 아로새겨 놓아

扶桑日照光晶熒(부상일조광정형) 부상(동쪽바다)에 해 비치니 수정처럼 반짝거리고

繁珠凝露濺輕濕(번주응로천경습) 흩어진 물방울 이슬 맺혀 물기 촉촉한데

壺中磘碧躔列星(호중요벽전열성) 호중 별천지의 푸른 구슬 별자리를 심어놓았네

瓊宮淵底不可見(경궁연저불가견) 옥 궁전 수궁 속 물 깊어 볼 수 없고

有時隱隱窺窓櫺(유시은은규창령) 때로 언뜻언뜻 그 창살만 어렴풋이 보인다네

軒轅奏樂馮夷舞(헌원주악풍이무) 황제 훤원씨의 풍악에 수신(水神) 풍이는 춤을 추고

玉簫竅窱來靑冥(옥소규조래청명) 그윽한 옥통소 소리 먼 하늘에서 들려오네

宛虹飮海垂長尾(완홍음해수장미) 휘어진 무지개 바닷물 마시느라 긴 꼬리 드리우고

麤鵬戲鶴翎翅飄(추붕희학령시표) 거친 대붕새는 학을 희롱하며 날개 짓 펄럭이네

曉珠明定塵區黑(효주명정진구흑) 영롱한 샛별 밝게 빛나건만 속세는 아직도 깜깜밤중

燭龍爛燁雙眼靑(촉룡난엽상안청) 촉룡의 부릅뜬 두 눈에선 푸른 기운 뻗혔네

驂虯踏鼲多鞸婷(참규답혼다필정) 용이 끄는 수레 타고 잉어 밟고 놂 하도 아름답고

天吳九首行冷鵧(천오구수행랭병) 머리 아홉 달린 천오귀신 어슬렁대며 가는 구나

幽沈水府囚百靈(유침수부수백령) 물속 깊고 으슥한 궁전에 온갖 바다영령들 가둬놓아

邪鱗頑甲毒風腥(사린완갑독풍성) 고약한 물고기 딱딱한 조개 독한 비린내 풍기니

太陰之窟玄機停(태음지굴현기정) 태음의 기운 서린 굴에 현묘한 이치 머물고

仇池禹穴傳神蹟(구지우혈전신적) 구지산 우 임금의 무덤에선 신의 자취 전하는데

惜許絶境訛圖經(석허절경와도경) 애석하게 절경이라 도경(圖經)에 빠졌구나

蘭橈拏入㩳神形(난요나입송신형) 조각배 노 저어 들어가니 심신이 쭈뼛하고

鐵笛吹裂老傀聽(철적취열노괴청) 날라리(太平簫) 요란히 부니 늙은 용이 듣는 구나

水咽雲暝梢愁人(수열운명초수인) 물은 오열하고 구름 짙어져 사람 근심 속 빠뜨리니

歸來怳兮夢未醒(귀래황혜몽미성) 황홀한 돌아옴이여 아직 꿈속인 듯 몽롱하기만 하네

嗟我只道隔門限(차아지도격문한) ! 나는 문이 막혀있어 나갈 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安得列叟乘風泠(안득열수승풍령)어찌하면 열자처럼 맑은 바람 타고 맘껏 날아볼까.

제주동굴소리연구회 현행복 소장 번역본 수정 인용

우도동굴 노래한 최초 선비 백호 임제

풍류남아 백호 임제(1549~1587)는 부친인 임진이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해 제주에 들어와 약 4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임제가 제주도의 명승지와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쓴 일기체 기행문이 남명소승(南溟小乘)’이다.

남명소승은 1577(선조 10) 113일 출발부터 이듬해 33일 귀경까지의 기행문으로, 존자암(영실 근처에 있으며 제주 최초의 절이라는 설이 있음)의 실체와 특산물 등 그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우도를 직접 방문해 우도동굴을 둘러보고 감회를 최초로 남긴 조선의 선비이다. 우도 탐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임제는 성산도에서 우도로 건널 당시 뱃사공이 파도가 세어 도저히 건너기 위험함을 알려도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늘의 굉장한 구경거리를 저버리기 어렵도다.”라고 말하며 강행했다.

다음은 임제가 쓴 남명소승 중 우도동굴 답사기전문이다.

‘제주 고기문집’ 중 ‘남명소승’ 표지.
‘제주 고기문집’ 중 ‘남명소승’ 표지.

사람을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로 보내 배를 대령시키도록 하였다. 우도를 선유(船遊)하기 위함이다. 정의 현감이 벌써 기다리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성산도(城山島)라는 곳에 당도하니, 그 땅은 마치 한 송이 푸른 연이 파도 사이로 꽂혀 솟아오른 듯 위로는 석벽이 성곽처럼 빙 둘러쳐 있고, 그 안쪽으로는 아주 평평하여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 바깥쪽 아래로는 바위 굽이가 기기괴괴하여 혹은 돛배도 같고 혹은 막집도 같고 혹은 일산(양산) 친 것도 같고 혹은 새나 짐승도 같아, 온갖 형상이 다 기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정의 현감을 만나서 함께 배를 타고 우도로 떠났다. 관노는 젓대를 불고, 기생 덕금이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성산도를 겨우 빠져나가자 바람이 몹시 급하게 일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배를 돌렸으면 하였고, 사공 또한 이곳의 물길은 과히 멀지는 않으나 두 섬 사이에는 파도가 서로 부딪혀 바람이 잔잔할 때라도 쉬이 건너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오늘처럼 바람이 사나운 날은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사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늘의 굉장한 구경거리는 저버리기 어렵도다.’라 말하고 결연한 뜻으로 노를 재촉했다. 물결을 타고 바람 채찍으로 순식간에 건너갔다.

우도에 가까이 닿자 물색이 완연히 달라져서 흡사 시퍼런 유리와 같았다. 이른바 독룡이 잠긴 곳의 물이 유달리 맑다(毒龍潛處水偏淸)’라는 것인가.

그 섬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데, 남쪽 벼랑에 돌문이 무지개처럼 열려 있어 돛을 펼치고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으로 굴의 지붕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황룡선(黃龍船) 20척은 숨겨둘 만했다. 굴이 막다른 곳에서 또 하나의 돌문이 나오는데, 모양이 일부러 파놓은 것 같고, 겨우 배 한척이 통과할 만했다.

이에 노를 저어 들어가니 신기한 새가 있어 해오라기 비슷한데 크기는 작고 색깔은 살짝 푸른빛을 띤 것이었다. 이 새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어지럽게 날아갔다. 그 굴은 남향이어서 바람이 없고 따뜻하기 때문에 바닷새가 서식하는가 싶었다. 안쪽 굴은 바깥 굴에 비해 비좁긴 하지만 몹시 기괴한데다 물빛은 그윽하기만 하여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위로 쳐다보니 하얀 자갈들이 달처럼 둥글둥글하여 어렴풋이 광채가 났으며, 또한 사발도 같고 술잔도 같으며 오리알도 같고 탄환도 같은 거의 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었다. 대개 온통 굴이 검푸르기 때문에 흰 돌이 별이나 달과 같은 모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시험 삼아 젓대를 불어보니 처음에는 가냘픈 소리였는데 곧바로 굉굉한 소리가 돼, 마치 파도가 진동하고 산악이 무너지는 듯 싶었다. 오싹하고 겁이 나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에 배를 돌리어 굴의 입구로 빠져나오자 풍세는 더욱 사나워 성난 파도가 공중에 맞닿으니, 옷과 모자가 온통 거센 물결에 흠뻑 젖었다. 고기나 잡는 작은 배인 좌하선(坐下船)은 낡고 반쯤 부서진 배라서 바다 위로 위태롭게 떴다 가라앉았다 해 간신히 뭍에 닿아 배를 댈 수 있었다.

고을 사람이 성산도의 북쪽 기슭에 장막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님은 먼저 들어가고 우리 일행 또한 밤길을 걸어 정의 읍내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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