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가 경관을 물결 꽃 속에 빚어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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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남구명 판관 제주서 재임 중
우도의 전경 보며 ‘소섬’ 시 지어

이형상 목사, 명승 탐라8경 선정
남환박물·탐라록·탐라순력도 남겨

섬 개간으로 점차 지역민 입도 생활
종달리 지미봉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
종달리 지미봉에서 바라본 우도 전경.

▲우암 남구명 판관의 ‘소섬’ 

우암 남구명(1661~1719) 판관은 1712년(숙종 38년) 10월부터 1715년 5월 사이 제주판관으로 재임하면서 제주도의 산천과 형승, 풍속과 신앙, 기후와 풍토 등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묶어 그의 4대손이 1860년에 목판본 시문집으로 간행한 서책이 ‘우암선생문집’이다. 다음 소개하는 시 ‘소섬’은 우암선생문집에 수록되어있는 글로, 우암이 직접 우도에 건너가 지은 글로 보인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김정의 ‘우도가’ 등을 읽고, 우도에 방목 중인 말 떼와 주간명월·동안경굴 등을 둘러보고 쓴 시로 보인다. 

소섬(牛島)
拏岑一脚走東南(나잠일각주동남) 한라산 한 줄기 동남으로 뻗치다가
斷入滄溟忽起峰(단입창명홀기봉) 바다에 들며 끊기더니 홀연 봉우리로 솟구쳤네
龜背草芽浮半沒(구배초아부반몰) 거북이 등에 띠풀 지고 뜬 듯 잠긴 듯
鵬霄雲日遠還通(붕소운일원환통) 넓은 하늘에 구름 태양 멀리 둘려 어울렸네
洲平霧鬣千群飮(주평무렵천군음) 섬은 평평하고 풀 무성해 말떼 먹일 만하고
巖罅龍宮萬舳容(암하용궁만축용) 바위틈 용궁엔 많은 배 들일 수 있는데
多事化工勤用意(다사화공근용의) 삼라만상 조물주가 부지런히 뜻을 펴서
寄觀羅列浪花中(기관나열랑화중) 기이한 경관을 물결 꽃 속에 빚어놓았네

탐라순력도 우도점마.
탐라순력도 우도점마.

▲이형상 목사의 우도방문기와 탐라순력도 우도점마

탐라순력도로 더 잘 알려진 이형상 목사는 제주와는 애증의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부임 다음해인 1703년 제주에 유배되었던 같은 남인인 오시복과 류항의 방면을 청하는 장계의 여파로 파직되어 결국 그는 제주를 떠나야 했다. 이형상은 재직 당시 제주 민중의 재래 신앙이었던 음사와 사찰 5곳 등을 불태우고, 또한 풍운뇌우단 등 성리학적인 예에 어긋나는 모든 의례를 과감하게 철폐하였다. 

그러나 삼성의 발상지인 삼성혈 근처에서 초라하게 지내던 제사를 위해 삼성사를 세우고, 제문과 상량문까지 직접 지었다. 특히 제주의 자연환경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알았던 비범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제주의 명승을 골라 탐라8경이라 부르고 상찬(賞讚)하였다. 그가 선정한 탐라8경으로는, 한라채운(漢拏彩雲), 김녕촌수(金寧村樹), 어등만범(魚登晩帆), 조천춘랑(朝天春浪), 화북제경(禾北霽景), 평대저연(坪代渚煙), 우도서애(牛島曙靄), 세화임월(細花林月)이다. 또한, 제주 최초의 백과사전 역할을 한 박물지인 남환박물과 탐라록 특히 탐라순력도라는 소중한 자산을 제주에 남겨주었다.

다음은 남환박물에 실린 우도 관련 내용으로 이형상 목사가 직접 방문하여 쓴 글이다.“누운 소의 모습인 우도는 정의현 지역으로 별방진과 수산진 사이에 있다. 닥나무만이 있는 우도에는 정축년(1698년)에 새로 목장이 설치되었다. 파도가 매우 험하여 건너가기가 어렵다. 동남쪽에 어룡굴이 있고 천연 돌집의 모습이 마치 대롱을 파놓은 것 같다. 지나는 곳에 수우(물소가 아닌 강치로 추정됨)가 놀라 울부짖으며 바다로 뛰어 들었고, 소리가 마치 산을 치는 듯했다. 또 괴이한 새가 있었는데 흰 기러기 모습이지만 조금 컸다. 색은 푸르고 부리는 고왔고 두 다리는 붉은 색이었다. 수백 마리가 무리지어 날아갔다. 이는 분명 다른 바다에는 없는 새였다. 늙은 어부들은 옛날부터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굴은 전부 남쪽인 바다 쪽으로 향해 있는데 조금 들어가면 돌문이 있었다. 5, 6척의 배를 숨길만 하다. 공기는 싸늘하여 모골이 송연한데 물빛은 그윽하여 마치 귀신과 괴물이 있어 음침한 모양이다. 올려다보면 흰 돌이 둥글둥글한데 마치 해, 달, 사발, 술잔, 거위알, 탄환과 같은 것들이 북두성처럼 흩어져 있다. 굴 전체가 모두 검푸른 빛인데 흰돌 사이에서 별과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날 날씨는 맑고 바람은 없었으니, (세속에서 신룡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가까이 가면 큰 바람과 우레와 비가 내리쳐 재앙이 잇따른다는) 속설은 거짓이었다.”

다음은 탐라순력도 41화폭 중 1702년 7월 13일에 실시한 우도 목장 내에 있는 말을 점검하는 그림인 우도점마(牛島點馬)에 대한 내용이다. 우도에서 자라는 말들은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와 보인은 23명이다. 그림에서 보듯 우도의 모습은 동두(東頭)라 표기된 곳을 머리로 하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포구와 어용굴(魚龍窟)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중 어용굴은 신용(神龍)이 사는 곳으로 어선이 접근하면 대풍(大風)·뇌우(雷雨)가 일어나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해친다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당시 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원조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우도 목장의 개간을 허락받은 이후인 1844년부터이다.

우도의 말.
우도의 말.

▲말의 고장 우도

우도는 제주 본섬과 같이 말의 고장으로, 류한명 목사가 1697년(숙종 22년) 말 200여 필을 우도에 방목한 것이 시초이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그리도록 한 탐라순력도 41화폭 중 하나인 우도점마(牛島點馬)는 우도에서 방목되던 말을 점검하는 풍속도이다. 당시 우도에는 260여 필의 말이 방목되고 있었다. 이후 1823년(순조 23년) 제주에 큰 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만연하자, 위유어사 조정화가 위무 차 제주에 왔다. 

그리고 우도와 가파도에 있는 목장이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험지이므로, 두 섬의 마소를 부근의 목장으로 옮기고, 대신 백성들을 섬으로 옮겨 농사를 짓도록 조정에 아뢰었다. 또한, 어사 조정화는 조정에 출륙금지령 해제와 우도목장 개간을 건의했다. 출륙금지령(1629~1823)은 그해에 해제되나, 목장 개간은 20년이 지난 1842년이 되어서야 허가되었다. 1842년(헌종 8년) 이원조 목사가 재차 우도와 가파도를 개간하는 것이 제주섬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된다고 아뢰어 조정으로부터 개간 허락을 얻어내었다.

이원조 목사가 임금에게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다. 
“우도의 말은 247필, 가파도의 소는 70여 두가 장부에 올라 있습니다. 그러나 방목한 후 방치하여 때로 사람을 보내어 점검하지만, 마소들이 사람에 익숙지 않아 놀라서 미쳐 날뛰므로 재갈을 물릴 수 없습니다. …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된 지 오래 되었고, 갈대가 썩어 쌓이고 마소의 분뇨로 질퍽한 곳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토양이 비옥하여 수백 집이 살기에 넉넉하고, 몇 천 이랑의 경작지를 일굴 수 있습니다.”

훈학자 김석린의 물통인 진사통.
훈학자 김석린의 물통인 진사통.

1842년 조정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조사하였더니, 우도에는 보리종자 735섬지기로, 가파도에는 보리종자 72섬지기로 잡혔다. 처음에는 들어가 살려는 사람들이 적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도에는 1844년 제주목에 사는 진사 김석린이 입주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주로 구좌와 조천 지역민들이 이곳에 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는 조천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진사벼슬을 한 김석린이 있었다. 그는 서당을 지어 훈학에 앞장섰고, 농경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우도선인들에게 과중한 부역과 세금을 덜어주는 역할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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