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비바람 품어낸 밭담…흑룡만리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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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류큐·필리핀 등 표류의 역사 다양
사마랑호, 남해안에서 해도 작성
상륙 대비하기 위해 방어 시설 보수
세계중요농업유산 밭담 정취 더 해
연대-환해장성, 연구·보호 ‘시급’
밭담은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도 밭들은 주로 외담(한줄 담)으로 둘러 쌓여 있다. 사진은 우도의 한 밭담.
밭담은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도 밭들은 주로 외담(한줄 담)으로 둘러 쌓여 있다. 사진은 우도의 한 밭담.

우도에 표류한 류큐인(오키나와)

바다를 건너는 것을 도항이라 하고, 바람을 동력으로 하여 도항하는 배를 움직이던 시대에 항로를 벗어나 조난되는 해난사고를 표류라 한다.

표류자에게는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당시 여러 나라의 통상적인 관례였다. 18077월 류큐인 6명이 탄 작은 배가 우도(당시 정의현 소속)에 표착했다. 필담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은 류큐국의 순검관과 사관 일행으로 큰 배에 탄 인원은 모두 99(여성 4)이었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에 표착했는데 다시 출항했으나 서남풍으로 다시 표류해 정의현 우도에 표착한 것이다. 이미 제주에는 5년 전인 1801,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표착인 5명이 머물고 있었다.

류큐 표착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필리핀인 여송국(呂宋國) 사람이라 했다. 여송국에 대한 정보가 없던 조정에서는 류큐인들이 귀국할 때 이들도 같은 배에 태워 필리핀을 경유해서 내려주고 가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류큐인들은 타국 표류인들을 태워갈 수 없다고 하여 류큐인들만 배로 귀국했다.

역사서에서는 바다 위에 출몰하는 외국배를 조선후기 전에는 황당선(荒唐船), 조선후기에는 국적을 말할 수 없는 배인 미변선(未辯船), 조선 말기에는 이양선(異樣船)으로 부르고 있다. 이양선이란 무장한 서양함선으로 군사작전을 위해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무장함대를 지칭한다. 그런 함대가 1845년 우도에도 나타난 것이다.

1845년 전후에 쌓은 연대와 환해장성

우도에 1845년경에 구축된 것으로 보이는 연대(망루)들이 우도 1번지 비양도와 최북단 전흘동 바닷가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연대들은 제주도의 38연대에는 포함되지 않고 있다.

38연대를 쌓은 성담들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항만을 구축한다는 명분 등으로 바다에 투석·매립되어 사라진 반면, 우도에 있는 2개의 연대는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다. 어떠한 연유로 비지정문화재인 연대와 환해장성이 우도에 구축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1845(헌종 11) 6월 우도에 사마랑호라는 영국군함이 나타났다. 영국군인들은 흰 깃발을 세우고 섬 연안을 1개월 동안이나 머물며 수심을 측량하고 돌을 모아 회칠을 하며 방위를 표시했다. 제주목사 권직은 마병(馬兵), 총수(銃手), 성정(城丁)들을 동원해 만일의 변란에 대비했다.

제주출신인 심계 김석익(1885~1956)이 편찬한 탐라기년(耽羅紀年)’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특히 환해장성(環海長城)이란 단어는 처음으로 이 책에서 등장한다.

“1845년 여름 이양선 1척이 우도에 정박했다. 이양인의 눈은 움푹하고 코는 높고 눈동자는 푸르고 머리는 양털과 같았다. 때때로 포를 쏘아대는 소리 때문에 산악이 진동했다. 작은 배를 타고 줄자로 섬을 측량했다. 백보마다 돌을 쌓고 회를 칠하고는 그 속에 쇠자루를 끼웠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3읍 연안을 두루 묻고 말하는 대로 즉시 그림을 그렸다. 목사 권직이 놀라 마병과 총수 등의 군사를 모아 이에 대비했다. 그해 겨울에 환해장성을 수리하고 축조했다.”

영국군함 사마랑호의 함장은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였다. 함장은 1845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와 거문도를 항해하면서 조선의 남해안을 탐험하며 해도를 그렸다. 복장과 용모가 다른 청국인 오아순이라는 사람이 통역을 했다. 배에는 200여 명의 군인과 대포, 화약, 식량 등이 실려 있었다. 18455월 별방진 아래 어등포(魚登浦·지금의 구좌읍 행원리) 앞바다에 머무르며 작은 배 5척으로 해안에 상륙해 돌을 쌓아 회를 칠하고 단을 설치해 제를 지내기도 했다.

화북진 건입포 아래에서는 80여 명의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육지로 상륙하려 했으나 조선인 문정관이 무장해제 하라는 요구에 다시 배를 타고 대정현 지역으로 갔다. 그들은 이후에도 마라도, 범섬 등을 살피다가 610일에 다시 우도로 돌아왔다고 위 책은 전한다. 다음은 권직 목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배의 생김새와 사람 모양으로 볼 때, 지난 경자년(1840) 소를 토살 하고 배에 싣고 간 대영국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척 험상궂고 모질었고, 대포를 쏘고 칼을 휘둘러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큰 배는 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고, 왕래하는 작은 배들은 나는 새처럼 빨라서 추격해도 붙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마랑호가 제주도 삼읍 해안에 머문 기일은 20일 정도이다. 영국함선의 무력을 실감한 권직 목사는 같은 해 겨울 삼읍의 백성을 동원해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고쳐 쌓게 했다. 우도에는 당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해장성이 제주의 어느 곳보다 많이 남아있다. 이를 보호하고 전승하는 일은 특히 제주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특히 우도에는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2개의 연대가 있다. 38개의 대부분의 연대가 허물어지거나 기단조차 예전의 돌이 아닌 현대식으로 축조된 반면, 우도의 연대는 당시의 돌들이 원형으로 잘 남아있어 문화재로 지정을 서두를 필요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2기의 연대는 우도 1번지인 비양도와 우도 최북단 지역인 전흘동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우도 도처에 있는 환해장성은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우도 해안을 둘러쌓은 환해장성의 흔적이 제주 어느 곳보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그러나 우도의 환해장성이 언제 어떻게 구축된 것인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1845년 영국군함인 사마랑호가 우도에 정박한 것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또는 조선시대 우도목장이 들어섰을 때 말들이 바닷가로 도망가거나, 바위틈에 실족하여 다치거나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관계 당국을 비롯한 향토사학자들의 연구와 보호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농업유산인 흑룡만리 우도밭담

제주의 농산어촌 어디에서도 불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정겨운 밭담이다. 특히 우도 밭담과 한림 귀덕리의 일주도로변 밭담은 더욱 눈길을 끈다.

우도 도처에서 만나는 아기자기한 밭들이 주로 외담(한줄 담)으로 둘러 있고, 귀덕리의 밭담들은 잣담(잔돌을 쌓아 만든 담)으로 둘러 있어 그 담 모양이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이라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도의 경치와 어우러진 올망졸망한 밭담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디에서 보든 제주선인들의 땀방울이 맺힌 밭담과 돌담들은 이젠 영롱한 현무암석의 보물들로 진화하고 있다.

이원진 목사가 쓴 탐라지(耽羅志)’에는 밭 사이에 경계가 없어 힘센 자들이 약한 자의 토지를 잠식하기에 김구(고려시대 제주 판관)가 지역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선을 구분 지으니 지역민들이 편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거친 바람으로부터 흙과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밭에서 골라낸 돌들로 밭담을 쌓는 일은 농경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담 중 잣백담(잔 돌들로 넓게 쌓은 담) 또는 머들은 농경문화 이래 밭에서 캐낸 돌들을 성처럼 쌓아올린 담이고, 잣성은 조선초기부터 한라산 지역에 설치된 목마장의 경계에 쌓은 담이다.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적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선을 돌아가며 쌓은 성담이다. 3읍성, 9진성, 25봉수대, 38연대 등의 성담들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등을 거치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허무한 역사의 한 단면에서 우리의 역사 허물기로 이어지는 일제의 만행을 읽는다.

2013년 국가 중요농업유산에 완도 청산도 구들장 논과 함께 제주도 흑룡만리(黑龍萬里) 밭담 지정에 이어, 2014년에는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제주역사와 제주문화가 서린 제주밭담의 미학을 우도 도처에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볼거리이다. 흑룡만리는 검은 현무암 돌담이 마치 검은 용이 만리장성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형상을 이르는 말로, 송성대 제주대학교 전 교수에 의해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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