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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섬 속의 섬, 우도의 역사문화 깃든 길
김석린 19세기 우도에 처음 정착
마을공동체 이루는 등 공덕 칭송
교육 중요성 인식해 서당 만들어
아들 김양수, 詩로 역사를 기록
소섬 영명의숙 출신 항일에 앞장
김석린 진사는 우도에 정착해 마을을 개척하고 훈학을 개설해 주민을 가르쳤다. 그는 조선시대 우도의 개척자였다. 사진은 김진사 거주터.
김석린 진사는 우도에 정착해 마을을 개척하고 훈학을 개설해 주민을 가르쳤다. 그는 조선시대 우도의 개척자였다. 사진은 김진사 거주터.

우도의 개척자 김석린 진사 가족 유애비와 구휼비

우도의 토질은 150여 년 동안 마소의 배설물로 버무려져 있어 본토보다 비옥한 편이다. 183만여 평인 우도의 땅은 대개 1000여 평 내외로 분할돼 있다.

그만큼 이주민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누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오솔길과 같은 자그마한 농로가 많은 것은 맹지(진입로 없는 경작지)를 최소화하려 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우도의 경관을 있게 한 데는 우도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공서 김석린 진사의 공이 지대하다 전해진다. 본관이 경주인 김석린 진사는 1826(순조 28) 생원시에 합격해 한양에서 진사벼슬을 하던 중 1842(헌종 8) 조정에서 우도에 기경(起耕)허가를 내리자 1844년 부인과 함께 우도에 들어와 이주민들을 훈학하며 마을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1842년 우도와 가파도에 대한 입경 허가가 나자, 제주목사 이원조는 유이민(流移民)들도 농산물과 해산물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에 김석린 진사는 당시의 세폐와 관폐에서 오는 어려움을 우도선인들 편에 서서 적절하게 해결했다. 김진사가 죽은 후 우도 유이민들은 김진사의 공적을 기리어 우도 입경허가 60주년이 되는 19024월에 진사 김석린 유애비를 우도의 중앙인 포젯동산에 세웠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두 동강이 났고 1962년에 지금의 비가 세워지고 2000년에는 천진동 포구 광장에 진사김공석린우도구휼비(救恤碑)가 세워졌고 지금은 우도 중앙에 조성된 우도역사공원으로 이전되어 세워져 있다.

김진사와 관련한 유적으로는 우도 중앙에 복원된 진사 훈학서당과 우물인 진사통과 딴밧터가 있다. ‘경주김씨 익화군 제주파세보등의 문헌에 따르면 김석린 공은 나라로부터 당시 우도 전체를 하사받았다 한다. 우도에 이러한 유애비와 구휼비가 세워질 만큼 큰 영향을 미친 김석린 지사 가족에 대해 간단하게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한학자로 유명한 난곡 김양수는 김석린 진사의 아들이다. 난곡 김양수(1828~1887) 선생은 제주 조천 출신으로 1874년 진사시에 입격해 지방 사림에 종사하면서 향토사 관련 역사적 기록들을 수많은 시로 남겼다. 시간은 흘러 일제는 1912년 우도를 비롯한 조선에 대한 토지수용령이라는 수탈적인 법령을 반포하고 미신고한 토지는 빼앗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헐값에 일본인 등에게 넘겨주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우도의 토지 문제를 의논하려 우도의 대표자가 김석린 진사의 손자인 김근시를 찾았다. 이에 김근시 공은 우도민에게 경자유전 하는 선조의 가르침에 따라 아무런 조건 없이 우도민들에게 연고가 되는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신고하라고 했다 전해진다. 이러한 일이 우도에 알려지고 우도 땅의 소작인이 아닌 소유인이 된 우도민들은 우도의 개척자로 지금도 김석린 지사의 공덕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소섬 중앙에 위치한 우도역사공원과 우도서당

1844년 부인과 함께 우도로 건너온 김석린 진사는 입주민을 모집해 정착시키고 농·축산업을 권장하며 적극 개발에 힘쓰니 불과 몇 년 만에 가구 수가 수백 호로 늘었고 주민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날로 발전해 나갔다.

한편 과중한 세금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을 안 김석린 진사는 이를 감면해 주는 등 섬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우도 중앙에 위치한 충혼묘지 근처에는 그를 위한 유애비가 세워져 있으며 포제 시에는 김석린 진사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여 해마다 향제를 올려 오늘에 이른다.

그가 식수통을 파서 물을 받아 마셨다고 하는 물통을 진사통이라 하고 진사통 바로 옆에 훈학 터가 있는데 최근에 서당 형태로 복원했다.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서당이 우도에는 복원돼 있어 우도가 역사문화를 잘 계승 발전하고 있는 지역임을 느끼게 해준다.

예전에는 우도에 용천수가 희귀해서 빗물을 받아서 썼다. 실제로 우도봉 아래에는 빗물을 받아 식수로 썼던 담수정수장과 저수지도 남아있다. 지금 이 건물은 우도의 역사문화가 깃든 다목적 건물로 개조 중이다.

2010년부터 성산에서 해저로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우도 전 가정에 상수도가 공급되고 있다. 우도는 물이 귀했던 섬이기 때문에 아직도 섬 곳곳에 예전의 물통이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진사통이다. 특이한 것은 당시 우도선인들이 장만한 도처의 수많은 물통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최근에 조성된 저류지는 물이 땅으로 스며들고 있어 옛 선인들의 지혜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 최고의 영명의숙과 사립연평심상소학교

우도교육은 제주교육과, 제주교육은 국가교육·세계교육과 교류하며 나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우도교육을 더 넓은 시야로 파악하기 위해 제주교육과 연관해 소개한다.

서당은 우리나라의 교육역사상 생명이 가장 긴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서는 보편화된 마을학교였다. 우도에도 1844년 이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할 때부터 김석린 진사가 앞장서 설립한 마을서당이 들어서 주민들의 자제들을 교육했다.

김석린 진사의 훈학에 이어 1900년 성읍(표선면 가시리) 출신의 한학자 오완철이 우도에 초빙돼 훈학하며 교학 활동이 전개됐다. 그는 1901년 우도의 지명을 연평(演坪)이라 개명했으며, 1902년에 건립된 진사김공석린유애비(임에게 힘입은 일, 숨소리 그친 듯하니 천추에 길이 빛나리. 아픈 민폐로 실의에 찬 백성에게 독한 세금을 감하도록 애썼으니)’의 문장도 그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1905년에는 조정에서 우도 출신 고달인에게 효자 완문(完文)과 전령(傳令)이 내려졌는데, 효자비는 김진사 훈학터 근방인 돈동산에 세워져 있다. 이로 미루어 우도에는 타지보다 높은 수준의 훈학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도 이주민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지역 중심으로 글방을 만들어 한문서당을 열거나 근대화된 신교육의 필요성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상()우목동 중간지점에 초가삼간을 마련해 개량서당인 영명의숙을 개설했다.

사설로 세워진 서당이나 글방을 사숙(私塾)이라 칭하는 반면, 공익을 위해 의연금으로 세워진 교육기관이 곧 의숙(義塾)이다. 이로 보아 영명의숙은 우도 도민들이 의연금을 모아 지어진 주민 모두의 성원과 지원으로 설립된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당시 제주에는 80여 교의 개량서당(의숙·사숙)에서의 훈학 활동이 밝혀지고 있는데, 대부분 교사가 1~2명에 불과하고 학생 수도 50명 이상인 의숙이 13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도의 영명의숙은 160여 명이 다닐 정도로 단연 제주 최고의 의숙이었다.

의숙 초창기의 교사들은 민족주의자로 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훗날 우도발전을 견인한 우도선인들과 해녀 항일운동에 앞장선 우도의 저항인사들이 모두 영명의숙 출신들이다.

이렇듯 우도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근대적인 개량서당을 지어 훈학활동을 전개하자 1918년 일제는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서당규정을 제정, 1929년에는 개량서당의 설립을 도지사의 인가제로 개정해 개량서당을 폐쇄하는 등의 탄압을 강화했다.

그 결과 1930년 이후는 개량서당이 급격히 감소했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에 의한 11교제 즉 면단위에 1교의 초등학교만 공립으로 운영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이에 우도에서는 후세교육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을 모아 운영하던 의숙을 1938년에는 사립으로 더욱 후원해 사립연평심상소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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