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R?’, ‘아스무레?’
TV에서 바닷가 여행 프로그램을 보다가 낯선 자막을 보았다. 수평선 너머 먼 풍경이 아스무레하다는 의미의 새로운 축약어인가,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했다. ASMR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자율신경 쾌락 반응)’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인데, 오감의 자극을 통해 심리적 안정이나 쾌감을 얻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다. 파도 소리와 빗소리, 풀벌레와 새 소리처럼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백색 소음과 비슷하지만, ASMR은 보다 다양하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행해진다는 설명이다. 
ASMR을 위한 동영상도 많다. 진행자가 시청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손동작과 함께 속삭이기, 말없이 바삭한 과자나 젤리 먹기, 손톱이나 혀로 마이크 두드리기, 책갈피 넘기거나 연필 사각거리기, 말린 꽃잎이나 포장지 비비기, 타이핑과 마우스 누르기, 이모티콘을 화면에 톡톡하며 띄우기 등이 있다. 특정한 장소에서 시도하는 경우도 보인다. 미용실에서는 가위질과 면도기 소리를 들려주고, 빗의 솔을 튕기다 고무장갑을 비빈다. 학교에서는 손톱으로 건물의 철문과 플라스틱을 두드리고, 연필깎이를 돌리다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뗀다. 전문 업소에서 귀 청소나 두피 마사지 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동영상을 누가 볼까 싶지만, 원하는 사람이 많은가보다. 주위에 우울증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흔하다. 현대인은 왜 이렇게 불안할까. 인터넷 발달로 전 세계의 부정적 뉴스를 과잉으로 알게 된 것이 한 원인이다. 예전엔 동네 소식에 그쳤던 정보가 범위를 지구로 넓혔다. 역병과 전쟁, 범죄와 재난 등 걱정할 범주가 커졌고, 인간관계의 갈등은 보다 직접적으로 스트레스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것에서 연상되는 과거의 부정적 사건을 계속 생각하고, 스트레스가 가져올 미래를 상상하며 걱정을 부풀린다. 현재라는 시간은 다리를 과거와 미래에게 하나씩 잡힌 채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심하게 발버둥칠수록 현재는 아래로 점점 가라앉는다. ASMR 동영상은 비명을 지르는 현재를 구하려는 한가닥 동아줄인 셈이다.
나도 불안감을 덜기 위한 방법을 갖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 수납장에 달린 라디오부터 켠다. 하루를 시작하고 세상에 동참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그래야 밤새 가라앉은 공기에도 활기가 돈다. 새소리에 잠을 깨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는 환경이 아니어서, 집안이 조용하면 불안하고 적적하다. 그 틈을 타고 생각은 과거나 미래로 달아날지도 모른다. 현재를 잡아두기 위해 음악과 광고라도 들어야 한다.
요즘은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릴 정도로 불이나 물을 보며 생각을 비우는 방법이 유행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뇌는 백지상태일 수가 없다. 잘 때도 뇌의 일부는 활동한다. 생존을 위해 위험과 기회를 항상 의식해야 하므로 뇌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동원되는 방법들은 생각의 비움이 아닌 집중인 셈이다. 향초 맡기나 명상 호흡도 들이쉬고 내쉬는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어차피 생각을 비울 수 없다면 다른 것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음악을 들을 땐 가사나 멜로디 때문에 상념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동영상 속의 ASMR은 시청각을 단순하고 말초적인 반복으로 자극해 신경을 잡아둔다. 지나치면 중독에 빠질 우려가 있지만, 다른 것에 집중할 여건이 안되는 이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갈 곳 잃은 마음은 곧잘 심리적 퇴행을 겪는다. ASMR 동영상에서 들려주는 소리는 딸랑이나 요람 흔드는 소리, 끊임없는 뽀뽀나 등 토닥이는 소리와 비슷하다. 진행자의 표정도 엄마가 아기에게 하듯 부드럽고 따뜻하다. ASMR 동영상은 어른에게 제공되는 일종의 아기 놀이가 아닐까. 다중 스트레스라는 겹겹의 포대기에 둘러싸이면 어른도 아기가 되고 싶어지는 법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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